요사이 미스트롯 방송을 자주 찾아보는 남편의 모습이,
내 눈에는 한층 더 ‘할아버지’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트로트라는 장르를 폄하하려는 의도는 결코 아니다.
다만, 매일 아이들을 마주하며 그들의 언어와 속도에 주파수를 맞춰야 하는 내 직업상,
나는 누구보다 ‘요즘의 것’들에 필사적으로 안테나를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온 세상을 달구었던 ‘두쫀쿠(두바이 초콜릿 쫀득 쿠키)’ 열풍 때도 그랬다.
둘이서 백화점을 어슬렁거리다 마주친 긴 대기 행렬 앞에서
나는 슬쩍 남편의 옆구리를 찔러보았다.
“우리도 한번 줄 서볼까?”
유행이라는 파도에 발이라도 살짝 담가보고 싶었던 내 마음은,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단호박 같은 남편의 거절 앞에 바로 막혀버렸다.
미련이 남은 나는 책 읽기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슬쩍 물었다.
“너희 두쫀쿠 먹어봤니?”
수업 내용이 아닌 질문에 신이 난 아이들은
너도나도 친절한 설명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내 돌아온 한마디가
묘한 위로와 씁쓸함을 동시에 안겼다.
“선생님은 아마 식감이 별로라고 하실지도 몰라요.”
내가 이미 자기들 입맛과는 거리가 있는 나이라는 뜻이겠지.
그 배려의 거리가 느껴졌다.
‘그래, 그게 뭐 별다른 맛이겠어’ 애써 가볍게 넘겼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학생이 두쫀쿠를 챙겨 와 내밀었다.
매장마다 맛이 다르다며,
어머니가 백화점에서 가장 맛있다는 곳에서
직접 사다 주셨다는 귀한 녀석이었다.
설렘과 감사한 마음으로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카다이프의 바삭함과 초코의 달달함이 입안 가득 폭죽처럼 터졌다.
아, 나도 이제 ‘두쫀쿠 먹어본 사람’의 대열에 합류했다는 짜릿한 성취감도 함께.
하지만 남편과의 ‘문화 격차’는 여전히 평행선을 달렸다.
모처럼의 여유를 영화 한 편으로 채워볼까 싶어 슬쩍 제안했다.
“요즘 <왕사남> 그렇게 감동이라는데, 우리도 볼까?”
남편은 역시나 방어 기제를 가동했다.
한국 영화는 취향이 아니란다. 그의 취향은 확고하다.
그랬었지.
남편은 "탕탕" 총소리에 악당은 결국 죽고 착한 주인공이 살아남는 총 쏘는 영화나,
날쌘돌이들이 "챙챙"거리며 칼을 들고 날아다니는 영화를 좋아한다.
서사가 촘촘한 영화는 그에게 그저 지루한 영상일 뿐이다.
학원 수업이 없어 쉬는 금요일,
혼자서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집 앞 중개사 여사장님을 마주쳤다.
패션 감각도 세련되고 늘 아름다운 그녀.
나보다 한참 동생인 줄 알았다가 몇 살 차이 나지 않는다는 걸 알고
괜히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던 그녀가 반색하며 외쳤다.
“사모님! 저 작가님 책 사서 그날 밤에 다 읽어버렸잖아요. 어쩜 그렇게 재밌어요?”
내 책을 읽어주신 것이 너무 감사해 길가에 서서 한참이나 수다를 떨었다.
화제는 자연스럽게 영화 〈왕사남〉으로 흘렀다.
“어머, 저도 아직 못 봤는데, 같이 봐요!”
사장님은 그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저녁 표를 예매했다.
남편에게 ‘까인’ 서러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실장님까지 합류한 중년 여성 셋의 설레는 ‘불금’ 회동이 성사됐다.
팝콘 향 가득한 금요일 저녁 극장에서
우리는 팝콘 대신 한라봉 주스를 쪽쪽거리며
함께 웃고, 또 함께 눈물을 흘렸다.
이제 두쫀쿠도 섭렵했고,
유행하는 영화도 마스터했다.
그런데 헤어지며 사장님이 던진 한마디.
“작가님, 올봄엔 빨간 옷이 대세래요.
하나쯤은 꼭 입어줘야 한대요.”
아, 유행의 흐름을 따라가는 일은 생각보다 고단하고 바쁜 일이다.
하지만 그 흐름에 함께하려는 마음이 나를 다시 살아 있게 한다.
자, 이제 빨간 옷을 준비할 차례다.
세상의 속도에 맞춰 나를 조금 더 선명한 색으로 칠해볼 시간.
올봄, 나는 기어이 빨간 옷을 입고 세상 밖으로 걸어 나갈 것이다.
내 마음은 벌써 백화점 매대의 가장 선명한 레드 스웨터 앞에 머물러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