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그런 문학

주인공인데.. 이름이 없어?

『나, 이끼』 후기

by 연서
"해리 포터, 프로도, 점순이, 데미안…."


혹시 생각해 보신 적 있는가. 작품 속 주인공에게 꼭 이름이 있어야 하는지? 우리는 이름이 주는 힘을 익히 알고 있다. 작품의 내용은 잊어도 우리가 캐릭터와 함께 울고 웃었던 감정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이름'이란 작가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거나, 독자들로 하여금 등장인물에게 친밀감을 느끼게 하여 작품에 더욱 빠져들게 만드는 마법 같은 도구다.

누구나 아는 그 대사, 조용히 해(?), 말포이.


"입 닥쳐, 금발머리 소년 1" 보다는

"입 닥쳐, 말포이"가 더 찰지다.


이름에 관한 얘기를 왜 꺼냈느냐 하면, 사실 나의 첫 습작 소설 『나, 이끼』의 주인공에게는 이름이 없다.


초고를 완성할 때까지는 작품의 제목조차 없었다. 처음 집필을 시작할 무렵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지만, 내 글에 대한 확신이 줄어 갈수록 ‘모자란 실력을 그럴듯하게 감추기 위해 이름 짓기를 미뤄둔 건 아닐까’ 하는 의심이 생겼다.

여전히 답은 찾지 못했다. 헤밍웨이가 말하길 ‘모든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다. 내 소중한 첫 쓰레기를 다듬고 다듬어, 이름을 붙여줄 수 있는 날이 오길 고대해 본다.

그 무렵 내가 적어둔 문장이다. 이제 작품은 완결이 났지만 주인공은 여전히 이름이 없다. 다만, 작품의 제목인 『나, 이끼』는 마지막 문장의 마침표를 찍는 것과 동시에 떠올랐다. 마치 이것 외에는 어떤 제목도 어울릴 수 없다는 듯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 얼마나 짜릿하던지. 이름은 짓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거구나 싶었다.


아무래도 주인공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 ‘남자는 가만히 잔을 집어 들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것은 다소 낭만적인 측면이 있다. 많은 부분을 독자의 상상에 맡겨야 할뿐더러, 정말 좋은 내용과 문체로 관심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중요한 부분을 읽기도 전에 작품이 지루해져 버릴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하면서까지 이름 짓기를 피해야만 했다.


쓰고 나서 알았다. 무명(無名)도 이름이라는 걸. 역시 그에게는 이름이 없는 게 어울렸다. 내 작품의 해설을 내 입으로 늘어놓는 것은 꽤나 몰염치한 일이지만, 고백건대 남자는 처음 글을 써 내려가던 내 모습을 똑 닮았다. 쓰고 싶지만 용기가 없고 시작한 글을 끝맺지 못했던, 누군가에게 내 글을 내보인다는 생각만으로 두려움에 떨었던 지난날의 내가 있다. 글을 쓰고자 하는 이라면 누구나 겪는 과정일 거라 생각한다. 나는 이 시절을 여러분과 나누고 싶었다.


처음 『나, 이끼』를 쓰던 시절에 남자는 나였다. 이제 완결을 냈으니 글을 읽는 여러분 중 누군가가 남자가 될 차례다. 이 과정을 돕기 위해 주인공은 무명이어야만 했다. 만약 주인공에게 희철이나 명수, 혹은 사르트르나 압둘라자크 같은 이름이 있다면 스스로를 투영하는 과정이 조금 심란해질 것 같으니.




이상 『나, 이끼』 후기였다. 읽어 주신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전한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잘 전해졌는지 모르겠다. 이름조차 짓지 못하던 부끄러운 첫 작품도 내 손으로 마무리 짓고 나면 소중한 내 새끼가 된다. 망설일 수 있고, 잠시 멈출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는 말자. 아무리 짧고 볼품없는 글이더라도 첫 작품을 완결 짓는 그 순간, 우리는 이미 작가다.


여러분의 소중한 첫 작품을 소개받을 날이 기다려진다.


분명 멋진 이름을 갖고 있겠지.





ps. 여러분들이 내 책을 '나이끼(지금 생각하시는 그 브랜드)'라고 친숙하게 부르는 상상을 하며 웃었던 적이 있다.


“야, 요새 나이끼가 유행이라던데.”

"어떤 모델? 에어포스?"



- 『나, 이끼』- 1

https://brunch.co.kr/@yeonbook/8


* 이미지 출처

https://tenor.com/ko/view/shut-up-malfoy-harry-potter-shut-up-daniel-radcliff-gif-7598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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