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정의 언어, 시스템의 무책임. 당신은 아닐것 같죠?
떨어지는 낙엽이 아직까지도 뜨거운 바람을 타고 내 옷깃을 스쳐 지나갈 때 난 실업자가 되었고,
온 세상이 하얗게 되고
핑크빛으로 물든 후
다시 초록빛이 될 때까지 난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대기업에선 3차...4차.
중소기업에선 서류 탈락하는 아이러니.
기간이 길어지다보니 마음에 이따금 태풍이 불어온다.
차라리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갔으면 싶지만,
태풍은 마치 날 읽고 있는 것처럼 한 발자국 뒤에 서서
주사바늘이 들어오기 직전의 아찔함만을 선사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햇빛을 오랫동안 받지 못한 새순은 노랗게 익어갔고
곧이어 가죽처럼 색이 어둡게 변했다.
그렇게..
마음이 썩어갔다.
내 새순은 30년간 태풍 앞의 촛불이었고,
의지할 공간이 없었다.
그렇게 불이 점차 꺼져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다시는 쓰이지 않게 되었다.
'그것'은 '선택'이 되면 안된다나 뭐라나.
차라리 모 게임처럼
'죽음은 탈출구가 아니다'
라고 정의해버리지, 하며 생각한다.
마들랜.
마음을 들어주는 랜선 친구 라는 슬로건 아래, 누군가의 새벽을 잡아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하지만 고작 몇번의 텍스트로 알 수 있었다.
'그럴 수 있어요.'
'그래도 괜찮아요.'
'내일은 분명 괜찮아질 거에요.'
'비온뒤엔 날이 개는 법이니까요.'
분명 사람인데, AI처럼 느껴지는 저 말투.
나는 단 몇마디만 나눠보고 포기했다. AI를 붙들고 얘기하는것보다 못한 시스템.
이 것들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통계는 줄고, 상담 수는 늘고, 시스템은 잘 돌아간다.
하지만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다.
그 시스템 안에서 살고 싶다고 말할 힘조차 잃은 누군가가,
'상담이 종료되었습니다'는 문구를 바라보고 있다.
역사속의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지만, 누가 전장에서 죽었는지, 누가 전장에서 다친 고통을 수십년간 앓다가 죽었는지 사람들은 기억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건물 안에서,
따뜻한 공기를 마시며,
당장 죽어갈지도 모르는 새순을 보며 '쯧쯧쯧 안됐다.'며 동정만 한다.
도움을 주는 건 너무 무겁고,
동정은 가볍고 말랑하니까.
그들이 말하는 '정책'은 언제나 윤기가 흐른다.
보고서 위에 잘 발린 문장들과,
시뮬레이션으로 계산된 생명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막상 그 정책의 문을 열어보면,
속은 텅 비어있다.
속이 빈 줄도 모른 채 겉포장만 다듬은 강정처럼.
위급한 누군가가 그것을 베어물었을 때,
기대했던 단맛도, 배를 채울 실체도 없다.
상담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진 문장들은
공기 빠진 튜브처럼 축 늘어져 있다.
2023년, 대한민국에선 하루 평균 38.3명이 스스로 '끄기'버튼을 '선택'했다.
남성은 9,747명, 여성은 4,231명.
이들은 전년대비 비율이 증가하는 추세다.
여전히 50대가 '끄기'버튼을 가장 많이 하지만,
최근 10대, 20대의 젊은세대에서 그 비율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수치는 분기마다 뉴스에서 나오며, 보고서에 적히고, 통계로 남는다.
모두가 알고있지만,
온실속의 화초들은 모른채 하고있다.
그 자리가 그렇게 안전한가.
그래서 그렇게 무감한가.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는 온실 속 화초들은 고작 리모컨 하나로 세상을 넘긴다.
채널을 틀면 코미디가 나오고,
잠시 인간극장이 나와도
'좀 우울하네' 중얼이고는 다른 방송으로 넘어간다.
화면 너머에 진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광고가 끝나기 전에 잊힌다.
진정 그들의 슬픔을 알고 싶다면,
그들의 삶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태풍이 몰아치는 방 한 칸에 앉아,
한 모금의 위로를 찾기 위해 창을 여는
그 순간의 체온부터 이해해야 한다.
그게 없다면,
그대는 지금도 그저 하나의 관객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