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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꽃말

07. 분홍 배꽃

by 한량돌

오늘은 너의 것이었지만 너의 이야기는 아닌 것에 대해 써보려 해.

감정에 쉽게 흔들리는 저 오빠가 또 본인 생각해 주는구나 착각하면 아마 실망할 거야.


오늘은 좀 무리를 했어. 1월 1일이었거든. 강원도에 다녀왔는데 어찌나 멀고 차가 막히는지 집에 겨우 와서 보니 몸살이 나버린 거야. 쌓인 일들 하는 건 둘째치고 밥 먹기도 힘들었어. 그래도 오늘 같이 피로한 날에는 방 보일러도 튼다? 안심해.


평소 몸이 비상 신호를 보내면 하던 루틴대로 마늘이 듬뿍 들어간 치킨을 먹었어. 한 조각 남기고 다 먹었다? 그러고는 씻지도 않고 이도 안 닦고 싱크대에 그릇과 물통 따위를 내팽개쳐두고 침대에 누웠어. 이거 진짜 비상 상황인 거 알지? 음식물이 덕지 묻은 그릇을 바로 안 닦고 내팽개쳐둔다는 건 깔끔 떠는 이 오빠에게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잖아.


어휴 미안해. 나 집중력 결핍 맞는 것 같아. 또 주제에서 한참 벗어났네.

널 오랜만에 불러서 그런가 봐. 너는 내가 어떤 말을 하든 다 받아줬잖아.



아무튼 본론으로 들어가면.

새벽 한 시쯤 식은땀에 젖어 일어나 내팽개쳐둔 설거지를 하고 샤워를 한 뒤에 몸을 닦으려 꺼낸 수건이 바로 문제의 분홍색 수건이었어. 웃는 얼굴 자수가 귀엽게 박힌, 네가 가장 좋아하던 분홍색 수건 알지?

나는 무작위로 꺼내 쓰는 게 아니라 선입선출 될 수 있게 정리해 두잖아. 마침 그 수건 차례였던 거지.

그게 뜬금없이 나를 위로하더라고.


나는 네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유튜브 중독이었잖아. 하하.

오늘은 '강철의 연금술사'라는 애니메이션 요약본을 봤어.

30분짜리였는데, 편집자가 정말 알아듣기 쉽게 작품을 해석해 주는데도 저런,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잘 안 되더라. 진리가 어쩌고.. 등가교환이 저쩌고..


그래도 내가 그 영상에서 얻은 깨달음이 없는 건 아냐.

영상에서 해와 달에 대해 설명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해는 양, 강함, 남자 뭐 그런 거래.

달은 음, 부드러움, 여자 라고 했고.


여기 어떤 해가 하나 있다고 치자.

그 해는 아직 미숙해. 크고 강한 힘으로 다른 것들을 정복하는 해들이 멋진 해라고 생각했대.

근데 시간이 흐르고 보니까 그런 해들의 영광은 오래 못 가더래.

어떤 해가 정말 멋진 해인지 살펴보니, 달과 함께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해가 오래도록 영광을 누린다는 거야.

어떨 땐 듬직하니 믿음직스럽고 어떨 땐 한없이 포용하는 부드러운 해가 진짜 멋진 해라는 걸 깨달았데.



그간 계속 앞만 보고 거칠게, 무식하게 달려왔던 나는 그 분홍 수건을 보고서 큰 위로를 받았어.

그 녀석에게 토닥토닥. 같은 느낌을 받았달까.

앞에 해와 달 이야기와 오늘 밤의 내 이야기가 맞는 비유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한동안 나는 나를 계속 부추기며 살아왔어. 뭐 나만 그럴까.

학생 때부터, 사회에 나와서도, 그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살지.

아무튼 그렇게 삶에 박차를 가하며 살아왔지만 이룬 건 별로 없는 것 같아.

오히려 빨리빨리! 할수록 내가 고장나버리더라고.

하여간 경쟁이란 거 진짜 나랑 안 맞아.


요즘 나는 나랑 사이좋게 지내려고 노력하고 있어. 가끔 내가 실망스러워도 너무 몰아세우지 않아.

일이 망해도 뭐 어쩔 거야. 나에게 필요한 건 실패한 나를 욕하고 억누르는 게 아니니까.

건설적이고도 부드러운 사후 조치가 필요한 거지.

나를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사람이 결국 나니까.



다시 분홍 수건을 쓸 시기가 왔을 때

그때의 나는 어떤 태도로 삶을 살고 있을까?

하도 변덕이 심한 나라서 예상이 안되네.


분명한 건..

우리는 점점 더 기억에서 멀어질 거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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