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민기 <ours> (무대륙, 서울, 2022)
찬 기운이 들어앉은 11월 어느 일요일 저녁 무대륙,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모호한 공연장에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모여있다. 공연 시작 직전, 관객의 기대와 설렘, 자리를 안내하고 정돈하는 스텝들의 분주함과 연주자들의 긴장감이 뒤섞인 기묘한 기류가 흐르는 순간, 언뜻 평범해 보이는 장소는 공연이 펼쳐지는 무대가 된다. 그러나 필자는 이 장소를 ‘무대’가 아닌 ‘공간’이라 칭하고자 한다. 무대라고 부르기에는 장막과 객석이 존재하는 기존의 것과 형태가 다르니.
깜깜한 공간, 그 모퉁이에서 불빛 하나가 발아하고, 그 작은 빛 아래에서 생황 연주로 공연이 시작된다. 공연이란 고정되거나 물려줄 수 있는 물질적 인공물이 아니다. 찰나적이고 변환적이며 현재성 속에서 완성된다.1)
공연을 아무리 기록하여도 2차 저작물로서 물질화될 뿐, 그 사라진 찰나의 순간을 복원할 수 없다. 그 찰나를 향유하기 위해 연주자와 관객은 암묵적 합의로 무대와 객석 사이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공연은 비로소 생산된다.
서민기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어떤 것들을 소리로 다룰 줄 아는 것 같았다. 그가 다루는 피리, 태평소, 생황. 이 악기들은 공간에 숨을 불어넣어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내는 우리나라의 공명 악기이다. 그가 한숨씩 뱉어내는 소리는 혼자서 독주하지 않는다. 현을 울려 소리를 내는 가야금·양금과 첼로, 사물과 신체를 두드리는 퍼커션 그리고 목소리. 여러 소리가 공간 안에서 하나씩 음을 쌓아가는 순간들이 하나로 모이고 교차하여 공간의 시간성을 형성한다. 공간의 모퉁이에서 생황의 화음이 점. 점. 점. 공간을 채우기 시작했을 때, 관객은 무대의 연주자와 분리되는 것이 아닌 찰나의 시간 속에서 모두 연결되어 흘러가는 것이다.
연주는 계속 여러 옷으로 갈아입으면서 변주한다. 서민기와 연주자들은 악기에 기대거나 신체를 재료를 사용하여 쌓아놓은 이야기를 하나씩 전달한다. <DEEEEEEP>은 바닥으로부터 깊이 울리는 디저리두의 진동과 몸을 비비고 두들겨 만드는 리듬은 생황의 가냘픈 화음을 곁들어준다. 그 뒤로 이어지는 태평소에 입김을 불어 넣어 만드는 음은 언어 없는 말처럼 다가와 맥박을 요동치게 하고 공간을 가득 메우더니 이내 다시 사라진다. 관에 불어넣은 입김은 밖으로 쏟아져나와 공간에 새로운 물질로 생성되다 소멸한다. 그 뒤로 이어지는 <뾰쪽이는 바다가 ( )처럼 일렁인다>는 서민기가 내뱉는 숨의 소리로부터 촉발하는 공간성이 강하게 드러나는 곡이다. 신체를 두드리는 마찰음과 허공을 찌르는 듯한 생황의 연주로 시작하는 이 곡의 서막은 이내 바다 깊은 곳으로 끌려 들어가다 다시 수면 위로 나오고 파도에 울렁이게 한다. <COMMON>은 양금으로 반복되는 경쾌한 선율로 이야기를 이어간다. 이 연주의 흐름을 더듬어가다 보면 매일 반복되어 단조롭고 평범해 보이지만, 그러기에 오늘 하루로 잘 버텨온 찬란한 일상을 그리게 된다. 반면 <하얀 시간>은 모든 것이 멈춘 세기말의 시간 속으로 끌어당기듯 주문을 외우는 소리로 체현된다.
“거미는 거미줄 꼭대기에 올라앉아서, 강도 높은 파장을 타고 그의 몸에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할 뿐이다. […] 비자발적인 감수성, 비자발적인 기억력, 비자발적인 사유는 이런저런 본성을 가진 여러 가지 기호들에 대해 기관 없는 신체가 매 순간 보이는 강렬한 전체적 반응들 같은 것이다.2)
대사나 문장 없이도 관객은 서민기가 숨을 뱉고, 몸을 비비고, 다양한 음파를 보내며 얼기설기 쳐놓은 거미줄에 올라앉아 전해지는 미소한 진동을 감지하고 온몸으로 느끼고 해독하게 된다. 이 비자발적인 감각의 작동은 연주자의 감각에서 관객의 감정으로 전이되고, 이 감정들은 공간 안에서 서로 직조되고 관계를 맺음로써 하나의 물질로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ours’, 필자가 느낀 우리의 연결된 모든 것이었다.
p.s.
위의 글에 언급되지 않은 곡 하나, <후니>는 서민기가 누구에게 내어보는 독백으로 뾰족하게 도려내었다.
각주
에리카 피셔-리히테 저, 김정숙 역, 『수행성의 미학』 문학과 지성사, 2017, p.167
2) 질 들뢰즈 저, 서동욱, 이충민 역, 『프루스트와 기호들』 민음사, 2004, P.2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