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내년에 결혼해요.”

경계에 선 사람들, <고려인> 그 세번째 이야기

by 김진석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의 평범한 오후. 길을 걷다 문득 한 벤치 앞에 멈춰 섰다. 두 노인이 나란히 앉아 있었고, 햇살이 그들을 부드럽게 감싸고 있었다. 말은 없었지만,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엔 깊고 따뜻한 무언가가 있었다.

그 눈빛에 끌려 조심스럽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될지 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또렷한 우리말로 말했다.
“나, 고려사람이오.”
그 짧은 한마디에 오래된 시간이 쏟아져 내렸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먹먹함이 밀려왔다.


김 겐나지(80세). 최 루드미라(68세)

두 분은 웃으며 말했다.
“우린 내년에 결혼해요.”
처음엔 농담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눈빛은 진심이었다.


김 할아버지는 열 살 무렵 이곳으로 이주해 평생을 살았다. 아내와 사별한 지 10년. 최 할머니도 남편을 먼저 보내고 혼자였다.

“혼자 살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말끝을 흐리며 미소 지었고, 그 옆에서 김 할아버지는 조용히 그녀의 손을 잡았다. 말보다 깊은 손길이었다.


두 사람은 4년 전, 공원에서 처음 만났다. 자주 걷던 길, 몇 번의 스침 끝에 말을 건 건 김 할아버지였다. 그날부터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하루를 나눴다. 함께 시장을 보고, 벤치에 앉아 햇살을 마셨다.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처럼. 오래 함께한 부부처럼.


내가 카메라를 들자, 김 할아버지가 재킷 단추를 여미며 말했다.
“예쁘게 찍어줘요. 후손들이 보고 기뻐하게.”
그건 그냥 사진을 위한 말이 아니었다. 후세에게 남기고 싶은 작은 유언 같았다. 이 사랑이 기억되길 바라는 마음.


셔터를 눌렀다. 초록으로 가득한 공원, 부드러운 빛. 두 사람은 마치 한 사람처럼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 순간 확신했다.

사람은 늙어도, 사랑은 늙지 않는다.

두 분의 우리말은 완벽하진 않았지만, 마음은 그 어떤 시보다 깊고 진했다.

20190301_uz_kim_IM_7303.jpg 2019,03.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김 겐나지(80), 최 루드밀라(68) phpto by 김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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