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서의 초단편01
나는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굴었다. 어떤 사건은 끝내 잊히지 않지만 어쩌면 입을 다물고 얼마큼의 시간이 지나면 괜찮지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뒤를 돌아 굳이 지옥에서 올라오는 너를 떨어트려버리지 말자며, 나는 0 앞에서 그걸 꺼내지 않았다.
0은 나를 보면 늘 걱정어린투로 내가 어떤 불행을 안고 살고 있는지에 대해 묻고 내가 여전히 힘듦이 있다는 것에 안도했다. 은은한 미소와 함께. “다 그러고 살아” 대화의 끝은 늘 같다. 0은 그렇게 체념으로 향해있다.
있지 난 나중에 멋진 할머니가 되고 싶어. 체념과 멋짐의 공존이라니.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멋진 할머니를 꿈꾸는 0은 거울을 오래 보지 못했다. 듬성한 정수리와 희게 변한 가르마에 어우 너무 늙었다 하고 바닥으로 시선을 보내버렸다. 타인의 얼굴은 화장실 거울에 음식물 낀 거라도 보듯이 샅샅이 보면서.
0은 어디선가에서 본 오붓한 일본인 노인부부 사진을 나에게 보여준다. 말간얼굴로 곱게 옷을 맞춰 입었다. 저런 할머니가 되고 싶어? 응 난 발레를 하고, 소박하지만 깨끗한 옷을 입고, 그런 멋지고 곧은 할머니가 될 거야.
웃기게도 0은 늘 남편 앞에서 한껏 움츠러들었다. 잘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 남편 같은 사람이 어딨니. 일찍 들어오고 생활비 주는 남편. 그녀의 남편은 0의 세 곱절은 더벌지만 늘 허덕이기 직전의 돈만 주었다. 0은 결국 월, 화, 수는 나가서 일을 하고 나머지 시간은 모두 집을 치우고 자식을 돌보고 남편을 챙겼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는 이명이 생겼다. 귀 속에서 중심을 못 잡으면 생긴다고, 세상이 핑핑 돈다고 했다. 세상이 뒤집혀 보인다며. 야야, 땅이 천장으로 가는 거 같다. 그러더니 언제부턴가 잠이 안온다고했다. 그런0이 좋아하는 건 나와 나누는 대화였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주로 들려준다. 듣다 보면 답답하지만 꾹 참는다. 그녀는 사람들이 불행한 이야기를 들을 때면 조금은 땅이 덜 울렁거리는 거 같아했다. 다 같이 울렁거리는 땅 위에 있다. 우리는. 그게 위안인 거겠지. 0에게 미안하지만 난 결국 못 참고 거기서 아예 나왔다. 그 집에 가면 나도 같이 울렁거리는 땅 위에 올라탄 것만 같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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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어코 마련한 내 집. 시간에 맞춰 현관문비밀번호가 눌린다. 심장이 덩달아 그에 맞춰 같이 둥둥 박자감을 보였다. 나는 엄마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내 고양이와도 친하지 않은 그 남자와 끝내 결혼을 준비했다. 웃기지. 박박우긴 결혼인데. 남자는 내가 싫어하는 그래도,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래도 아빠 손은 잡고 들어가야지, 인사는 드려야지, 명절에 선물은 보내야지. 난 잠자코 남자의 말대로 했다.
오랜만에 본 엄마가 묻는다. 힘든 건 없니? 같이 살면서 어려운 건 없어? 응 엄마 오빠가 다해. 아빠는 음식물쓰레기 한번 버린 적 없잖아. 그 말은 왜 붙였을까. 엄마는 날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그 뒤로는 늘 남자를 칭찬했다 그리고 더 이상 내가 어떻게 사는지 묻지 않았다. 별다른 연락도, 안부도, 밥 먹자는 말도 없었다.
엄마집에 있는 고양이 나무, 나무가 보고 싶어 오빠.
남자가 말한다. 뭔 고양이만 보고 싶대. 어머님께 연락드렸어? 아니. 그래도 한 번씩 드려야지. 가족인데. 나는 로션을 덜면서 말한다. 오빠 낳았다고 가족인 게 어딨어. 남자가 침대에 묻은 고양이 털을 떼내다가 말한다.
야.
남자와 눈을 마주친다.
너 철없는 소리 좀 하지 마.
나는 손수, 굳이 만든 가족을 멍하니 쳐다본다. 아 오기였나 아니었음 좋겠네. 눈을 떨군다. 등을 기대니 소파와 마주 본 거울에 눈이 간다. 침대 밑에 숨어있는 고양이가 보였다. 말갛고 이쁜 내 고양이. 고양이는 아직도 남자와 친해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