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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Aug 03. 2021

러너스 하이

한여름을 달리다

선풍기가 꺼졌다. 천장에 실링팬, 창문에 서큘레이터, 그리고 두당 한 대씩 총 다섯 대의 선풍기가 밤낮없이 극한 노동에 시달리다가 일제히 휴식 모드에 들어갔다.


한참 산에 다니던 때가 있었다. 등산의 매력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특히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 있다. 그 순간은 정상에 섰을 때도 아니고, 정상 찍고 내려올 때도 아니고, 다 내려와서 도토리묵에 막걸리를 들이켤 때도 아니다. 그 순간은 산에 오르기 시작한 지 30분에서 1시간쯤 지났을 무렵, 체력과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 조용히 찾아온다.


등산의 고비는 참 빨리도 온다. 걷기 시작한 지 10분도 안 된 거 같은데 벌써부터 숨이 헉헉 차오르고, 아직 본격적인 오르막길도 아닌데 다리는 천근만근 무겁고, 심장은 견딜 수 없다는 듯이 날뛰기 시작한다. 괜히 왔네, 그냥 내려갈까, 속에서는 마음 약한 소리들이 아우성치고 몸은 울며 겨자 먹기로 나아가고는 있지만 더 나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을 때 한 줄기의 바람이 조용히 밑천을 드러낸 정직한 몸을 관통한다. 마법 같은 바람이다. 곧 터져나갈 듯 날뛰던 심장 박동이 잔잔해지고 팔다리가 가볍다. 비로소 내 몸이 산에 적응하여 몸에 리드미컬한 에너지가 생성되면서 기분이 좋아진다. 컨디션이 좋을 때는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이라도 신은 것처럼 몸이 붕 떠오른다. 달리기로 치면 러너스 하이(runner’s high)와 비슷한 쾌감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순간이다.


한여름 무더위에도 ‘러너스 하이’가 있다. 태양은 이글거리고, 선풍기는 뜨거운 바람을 뿜어내고, 하루에 몇 번씩 샤워해도 몸은 불덩이 같고, 밤에 자다 깨다를 반복하는 시간이 이어진다. 에어컨을 사야 하나 인내가 바닥날 무렵 그 시간이 오는데 더위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서 33도까지는 덥다고 느끼지 않고, 어제보다 1도만 낮아져도 시원하게 느끼고, 저녁에 30도 아래로 떨어지기만 해도 선선하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더위 잘 참는 나는 그렇다 치고 더위 많이 타는 남편이 어젯밤 밤공기가 쌀쌀하다면서 창문을 닫고 자는 걸 보고 이제 정점은 지난 것을 실감했다. 풀가동하던 선풍기가 하나둘 꺼지고 밤에 창문을 닫기 시작하면서 에어컨 소리는 쏙 들어갔다.


우리는 37도에 육박하는 한여름을 뜨겁게 리다 보니 러너스 하이를 맛보았다. 여전히 30도를 육박하고, 늦더위가 뒤통수를 치겠지만,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부는  보면 대세는 이미 기울었다. 더위는 정점을 찍었고, 이제 내려갈 일만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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