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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엇이든 씁니다 Jul 21. 2021

배롱나무

존재의 존재

여기 한 사람이 있다. 설상가상이라고 해야 하나, 집을 짓고 이사 와서 여러 가지 일들이 겹쳐 힘들고 슬픈 시간을 보내고 있다. 겉으론 멀쩡해 보였을지 몰라도 속은 썩어 문드러지고 있었고, 마음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땅으로 꺼질 것만 같다.


저기 한 나무가 있다. 오래전부터 거기 그 자리에 서 있던 나무다. 봄부터 새 잎 내고, 새 가지 내고, 부지런히 꽃을 피워냈다. 하늘이 우는 건지, 내가 우는 건지 유난히 길었던 장마에도 백일 동안 꽃이 피고 지고 피고 했다. 그 작은 나무가 한 사람을 구한다.


나무는 특별하게 한 일이 없다. 늘 있던 자리에서 늘 하던 대로 했을 뿐이다. 어느 결엔가 한 사람은 말없이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알아 차렸고, 나무에게서 선의를 느꼈다. 어떨 땐 실의에 빠진 나를 위해서 존재하는 나무라는 생각도 했다. 더 이상 그냥 한 나무가 아니었다. 나에게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특별한 나무가 되었다.


사람이 너무 힘들고 슬프면 나무에게 의지를 하고, 나무가 사람에게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너무 힘들고, 너무 슬프지 않았다면 우리는 만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인연이란, 참 신기하기도 하지. 10년 전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얻어 무심하게 심었던 한 나무가 10년 뒤 우연히 이 동네에 와서 집을 짓고 이사와 살게 된 한 사람에게 그런 존재가 될 줄 누가 알았을까. 아무튼 우연히, 어쩌면 운명적으로 나무와 나는 인연을 맺었고, 나도 할머니를 따라 앞마당에 배롱나무를 심었다.

 

인연이란, 어디 좋기만 하던가. 인연이 올 땐 어떤 부분이 아니라 전체가 온다.


올해 배롱나무는 죽은 줄만 알았다. 여름이 다가오도록 새순을 내지 못했다. 할머니는 지난겨울 추위에 얼어 죽은 것 같다고, 10년 만에 이런 일이 처음이라고 하셨다. 10년도 넘은 나무가 그럴진대 우리가 심은 아기 배롱나무는 말할 것도 없었다. 할머니는 체념하신 듯했지만 나는 나무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나에겐 그냥 한 나무가 아니라 특별한 인연이 되었기에 보낼 수가 없었다. 나무가 죽은 게 왠지 내 탓인 것만 같았고, 나무의 죽음이 불길한 징조인 것만 같았다. 나를 구했던 나무가 나를 다시 작년에 잠겨있던 감정 속으로 침잠시키고 있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배롱나무가 피워낸 꽃


그런데 죽었다고 생각한 나무는 기어이 살아났다. 나무의 절반은 죽었지만, 절반은 살아남았다. 늦었지만 새순이 무성해지더니 드디어 분홍 꽃이 만발했다. 기어이 살아내어 생명력이라는 것을 몸소 보여주었다. 살아내는 것이, 살아있다는 것이 얼마나 기적이고 감동인지 보여주었다.


식탁에 앉으면 보이는 배롱나무


나무가 이렇게 신기한 존재인 줄 미처 몰랐다. 지나고 나니 할 수 있는 말이지만 시련의 시간이 꼭 나쁘기만 한 것은 아니다. 새로운 감각이 열리고, 경험과 정신의 세계가 확장되기도 한다. 죽을 만큼 힘들었던 한 사람과 죽다 살아난 한 나무의 존재가 뜨거운 여름 한가운데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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