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분노, 보복, 화풀이, 그리고 복수. (※ 비속어 주의)
'RAPED WHILE DYING',
'AND STILL NO ARRESTS?',
'HOW COME, CHIEF WILLOUGHBY?'
이토록 짧고도 강력한 범죄 고발이 있을까? 저 문장을 만든 엄마, 딸이 당한 참혹한 죽음을 세 단어로 줄여 광고판 문구로 만들어낸 엄마, 밀드레드. 그녀는 동네 공식 또라이로서 여기저기 분노를 분출하는 시한폭탄 같은 아줌마지만 저 문구를 만들 때만큼은 지극히 이성적이고 지극히 지적이고 또 지극히 천재적이었음이 분명하다.
‘죽어가면서 강간을 당했다’는 표현은 ‘강간당해서 죽었다’ 혹은 ‘강간당한 후 죽었다’와 분명 다르다. 죽어가는 동안 계속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다. 일어나지 말았어야 할 일이며 알고도 외면하고 싶은 진실이고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참사이다. 그러나 엄마는 이것을 외면하지 않고 잊으려 하지도 않는다. 되새기고 또 되새기며 명심 또 명심한다. 왜?
반드시 놈들을 찾아내어 복수를 해야 하니까. 딸이 당한 일을 수백 번 수천 번 떠올리고 곱씹으며 문구를 만든 엄마의 마음은 어땠을까? 감히 누구도 그 마음을 안다고 할 수 없으리라.
진짜 천재는 저 문구를 만든 감독이다. 상 많이 받은 것으로 안다. 받아 마땅하다. 세 단어로 된 이 짧은 문장이 이 영화가 가진 깊이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다. 저런 문구, 아무나 만들지 못한다. 아주 쉽게 만든 문장이거나 우연히 떠오른 문장일지라도 그것마저도 그의 능력이다. 진짜 능력은 노력보다 영감에서 온다.
사람들은 쉽게 ‘용서’를 말한다. 또는 자신이 타인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 세상에서 자신에게 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감히 말하고 싶다. 용서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는 예수님을 보면 안다. 예수님 정도 되면 자신에게 해를 가한 어리석은 인간들을 용서할 수 있었고, 그래서 예수는 지금까지도 숭배를 받는 것이다. 본인이 예수 같은 성인이 되어 앞으로 수천 년 동안 숭배받을 정도의 경지에 이른 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음에야 감히 용서를 마음에 담지 않는 것이 낫다.
타인에게 용서를 강요해서도 안 된다. 해를 입고도 가만히 있는 인간은 자신에게 해를 입힌 상대가 무서워서이거나, 더 큰 해가 되돌아올까 봐 두렵거나, 삶의 자세 자체가 우유부단하여 뭔가를 실행하지 못하는 유형일 것이다. 혹은 속 안에 분노를 쌓아가면서도 복수는 계속 미루고 있는 것이다. 다이어트가 늘 내일부터인 것처럼. 혹은 언젠가 올 단 한 방의 완벽한 복수를 위해 조용히, 조금씩, 차곡차고 준비 중인 것이다.
나는 용서보다 복수를 믿는다. 아니, 용서하는 법보다는 복수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멋진 복수극은 그 어떤 예술보다 아름답다. 주인공마저 처참한 최후를 맞이할지라도 장엄한 복수의 드라마는 우리에게 감동을 준다. 복수는 인간을 강하게 만든다. 복수는 인간으로 하여금 ‘생각’이라는 것을 하게 만든다. 따라서 복수는 인간을 성장시킨다.
복수는 보복이나 화풀이와 다르다. 보복은 누군가에게 맞으면 그 자리에서 바로 맞받아치는 즉각적인 반격 행위이고, 화풀이는 동에서 뺨 맞고 서에서 때리는 행위, 방향을 잃은 보복의 일종이다. 둘 다 복수보다는 격이 한참 떨어지는 대응이다.
복수는 어떤 일을 당했을 경우 일단 한 걸음 물러난다. 본인이 겪은 일에 대해 생각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다. 자신의 역량과 상대의 약점을 분석하여 내가 당한 것을 되갚아 줄 전략과 전술을 짜고 시기를 타진한다. 적절한 시기가 오면 내가 받은 그대로 혹은 내 화가 풀릴 만큼 돌려주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둘 다든.
밀드레드는 보복과 화풀이의 단계를 차곡차곡 밟아 올라 최상급 단계인 복수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이것이 내가 밀드레드의 행보에 박수를 보내는 이유다.
물론 모든 복수에는 상처가 따른다. 그래서 상처뿐인 영광이라는 말도 있다. 그래도 복수는 해야 한다. 복수를 하지 않으면 상처만 남을 뿐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존엄도 잃게 된다. 밀드레드가 복수를 포기할 때 자신이 더 살아갈 이유도 상실하게 될 것이다. 밀드레드에게 복수는 삶의 이유이자 종교가 되었다.
이 멋진 배우를 어떡하지? 아, 그냥 멋지고 멋지고 또 멋지다.
중성적 매력이니 뭐니 하는 수식어도 다 부족하다. 그냥 멋질 뿐이다.
하느님을 앞세워 주제넘는 조언질을 하는 신부에게 조곤조곤 퍼붓다가 끝에 가서 강렬한 일침을 날리는 장면은 시원함을 넘어 사이다 팡팡 터지는 희열까지 느끼게 한다. 그 대사와 그 표정은 맥도먼드이기에 가능했다. 맥도먼드의 분노에 찬 눈과 날렵한 코, 입가 깊은 주름, 강인하고 샤프한 턱선이 아니었으면 그 대사가 그렇게 찰지게 귀에 와서 박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언젠가 저런 장면 하나 찍어본다면 소원이 없겠다. 영어 대본을 찾아서 대사를 따라 해 보면 반분이 풀릴까 싶다.
난쟁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다. 키 작은 사람에 대한 모욕을 담은 표현이고 키가 작은 것을 장애로 취급하는 사회적 통념이 담긴 언어이다. (네네, 저도 키 작아요!) 대신 ‘작은키사람’이라고 말하고 싶다. 작은키사람인 제임스는 밀드레드를 좋아한다. 보수적인 작은 마을의 거친 남자들 사이에서 제임스 또한 그 짧은 다리와 커다란 머리로 인해 충분한 모욕과 수모와 분노를 겪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제임스에게는 밀드레드의 분노와 방황이 다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진심으로 그녀를 공감했을 것이고 그 공감이 호감으로 커 갔을 것이다.
제임스가 밀드레드와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만찬에서 자신을 차갑게 밀어내는 그녀에게 도대체 자기 마음에 조금이라도 관심은 있냐고 퍼붓는 장면에서 그 진심 어린 눈빛은 강렬하고도 애절했다. 밀드레드도 제임스의 진심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런 감정 소모에 빠질 여유가 없다. 그녀의 단호한 거절 또한 충분히 이해가 된다. 그래서 이 둘의 사랑(? 썸?)이 참으로 아름답게 느껴진다. 진심은 언제나 사람의 마음을 울린다.
제임스 역의 피터 딘클리지라는 배우는 왕좌의 게임에서 최후의 승리자였던 티리온으로 먼저 알게 되었다. 잃은 것이 너무 많고 당한 고통이 깊고 승리의 결과 또한 초라하지만 티리온은 마침내 살아남아 새로운 왕국의 설계를 맡게 되므로 최후의 승리자라고 부를 만하다. 참으로 끝내주는 캐릭터이고 그 멋진 캐릭터를 잘도 소화해낸 배우이다.
피터가 짓는 특유의 표정이 있다.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고 입술을 삐죽거리며 의뭉스럽게 상황을 뭉개는 그 표정은 명 배우 명 표정 베스트 3에 들어갈 만하다. ‘명 배우 명 표정’이라는 리스트가 있는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는데, 만약 없다면 내가 하나 만들어볼까 싶다. 어쨌거나 그는 작은 키 사람으로서 큰 성취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가고 있는 배우다.
사람 고쳐 쓰는 것 아니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도 맞다. 그러나 사람은 변한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듯 사람도 변한다. 그 변화라는 것이 갑작스러울 수도 있고 점진적일 수도 있다. 한 사람이 가진 여러 특성 중 어느 하나가 어느 순간 큰 작용을 하면서 달라지기도 한다.
딕슨은 변화하는 사람이다. 폭력 가해자, 인종차별주의자, 호모포비아에 마마보이이기까지 한 딕슨이었지만 한 가지 탁월한 능력이 있었다. 존경할 만한 사람을 골라내는 안목이 있었다는 말이다. 윌로비라는 최상급 인품의 가치를 알아보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고 그 능력의 작용으로 결국 개과천선을 하게 된다. 범인을 잡기는커녕 특정도 못했음에도 이 영화의 엔딩이 이토록 통쾌한 것은 밀드레드와 딕슨의 투샷 덕분이다. 범인인지 아닌지 모르나 나쁜 놈임이 분명한 그놈을 잡으러 가는 두 사람의 투샷이 너무나 유쾌 시원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