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렌스 데 프레. 차미례 옮김. 서해문집. 2010.
책에 대한 리뷰라기보다 역자 서문에 대한 리뷰라고 하는 것이 적절하다.
저자보다 더 눈에 들어온 번역자. 차 미 례.
나는 차미례를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초등 저학년 어린 나의 영혼을 훔쳐갔던 ‘원더우먼'
본방을 보지 않으면 다시 볼 기회도 없었던 시절, 만사를 제치고 TV 앞에 앉았고, 끝나고 나면 못내 아쉬워 입을 헤 벌린 채 엔딩까지 하염없이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드라마다.
그때 수많은 외국어 이름들을 지나 마지막쯤 뜨는 자막이 “번역 : 차미례”였다. 이 “번역 : 차미례”가 지나야 나는 비로소 TV 앞에서 물러나 밥을 먹거나 동생과 놀거나 잠을 잘 수 있었다. 매번 보다 보니 지금도 파란 바탕에 검은 글씨로 떠 있던 그 장면이 눈에 선하다.
바로 그 차미례라니!
번역자가 더 눈에 띌만하지 않은가.
어린 마음에도 참 예쁘고 세련된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멋쟁이 어른 아가씨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이대 영문과를 다니는 동네 부잣집의 대학생 언니 같은 사람일 것이라 상상했다. 번역이 무엇인지 몰랐다가, 누구한테 물었는지 몰라도 그 개념을 알게 된 다음부터는 ‘차미례’라는 이름이 원더우먼만큼 멋있어 보였다. 원더우먼은 물론 다른 모든 사람이 하는 말을 저 한 사람이 우리말로 다 바꾼 것이라고?! 영어를 전혀 모르는 아이 입장에서 얼마나 대단해 보였는지 모른다.
바로 그 차미례다.
그녀는 이후 영화 홀로코스트, 소피의 선택, 뮤직박스, 전쟁과 추억 등 다수의 영화와 드라마를 번역했다.
성장기 동안 주말의 명화 엔딩에서 그녀 이름을 자주 확인할 수 있었다. 또 차미례네.
대학 1학년 때 나름 충격을 받으며 읽었던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도 차미례 번역이었다. 소설도 하네.
어찌 보면 우리 곁에 가장 가까이 있던 번역가였다.
그녀가 번역한 목록들을 보면 작품 선정에 있어서 일관된 기준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 책도 그 기준 속에 있다.
나치와 제국주의 관련 작품들이 대다수다.
나아가 인간사에서 행해지는 다양한 폭력을 화두로 하는 책들이다.
번역가가 한 가지 주제에 몰입하는 경우는 드물지 않으니 그런가 보다 했다.
그런데, 이 책의 역자 서문에서 그녀는 인류사뿐 아니라 개인사에서도 폭력적 상황에 내몰리며 살아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역자 서문의 제목은 ‘<생존자>를 품고 34년 버티기’이고, 서문의 꼬리말은 ‘ 2010년 4월,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는 북한산 밑에서 아직도 살아 있는, 차 미 례’
이다.
이 제목과 꼬리말 사이에는 다른 역자 서문에서 볼 수 없는, 실로 전무후무한 일대기 요약이 있다. 차미례만이 가능한 서문이다.
서문의 해당 대목을 모두 옮겨본다.
20대에 아버지가 암으로 돌아가셨다. 어려운 형편에 치료도 제대로 해드리지 못했다.
- 나보다 더 심한 강제수용소 암 환자들과 그 가족들의 괴로움을 떠올리며 자책에서 헤어 나오기.
기족이 갑자기 실종됐다.
- 무고한 사람들을 끌어다 가족을 산산이 갈라놓고 ‘처리’한 나치의 강제수용소 생존자들의 경험을 떠올리며 버티기. 살아있다는 확신과 희망과 사랑을 버리지 않기. 결국은 시간이 해결해 줄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끝까지 참으며 끈기 있게 기다리기.
출장과 취재가 꼬이고 스케줄 관리도 안 되는데 시간은 없고 방송사 원고 독촉까지 산더미 같이 밀리고 아기도 돌봐야 하는데 세수할 시간도 없다.
- “몸을 씻지 않는 자부터 죽었다.”는 <생존자> 3장 내용 떠올리기. 자존의 문제. 아무리 참혹할 만큼 일이 엉켜도 아기 씻기고 나도 씻고, 화장하고 단정하게 옷 입고 나갈 준비와 주변 관리할 시간까지 뽑아내야 한다. ‘침착하자’는 주문을 외우는 동안 원고의 막바지 자판을 두들기고 전화받고 취재 약속, 예약과 주선을 하고 결국은 빛의 속도로 여러 가지 일을 동시에 해내는 능력 개발하기 30년.
나도 암에 걸렸다. 시간도 많이 남지 않았다.
- 나의 죽음, 내가 처한 현실을 담담히 받아들이기. 체력이 허용하는 한 출근 계속하고 하던 일도 운동도 계속하기. 지금까지 해온 일을 자책보다 축복으로 돌이켜보기. 힘을 다해 의연함을 유지하기 (완치된 후 기뻐 날뛰지 않기. 죽음의 지연, 생명의 연장 모두 내게 주어진 분복이자 삶의 초라한 일대기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기).
고통스러운 치료, 고통스러운 인간관계, 고통스러운 빈곤......
- 참는다는 것은 참을 수 없을 만큼 참는 것이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건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참는 것도 아니라는 주문을 외우며 참기. 책이나 음악 속으로 문화적으로 침몰하기(<생존자> 중 죽음의 수용소 담장 안에서 달밤에 한 노인이 경건하게 부르는 ‘콜 니드라이’의 고요한 선율이 수많은 죽음 직전의 사람들에게 기쁨과 치유를 전달하는 장면 연상). 남의 고통에 참견하고 제법 도움까지 주려고 들며 내 고통을 잊기......
여생은 짧고 할 일은 많다. 그런데 아직도 내 처지가 어렵다.
- 남은 시간 동안 오늘보다 내일, 올해보다 내년, 점점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기. 원한 대신 생존에 집중했던 생존자들처럼 남을 원망하지 않기. 원수들(나이 먹을수록 점점 늘어날 수 있다)을 용서할 힘을, 아무리 오래전이라도 나를 도와준 사람들의 호의를 절대 잊지 않고 사랑하는 데서 구하기. 불우 의식 지우기. 생사의 궁핍 속에서 물건과 음식을 ‘조직’해낸 생존자들처럼,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 함께 나누기.
1976년에 시작하여 2010년에 두 번째 초판(첫 번째 초판은 80년대에 나왔으나 당시 억압적 시대 상황에서 독자에게 전달되지도 못한 채 절판되었다고 함)이 나오기까지 34년간 그녀는 삶이 주는 많은 고통과 상처와 분노와 아픔을 이 책의 한 문장 한 문장에 기대어 버텨왔다. 그녀 혼자 품었던 이 책이 20대에서 50대를 넘길 때까지 삶의 지주를 세우고 버틸 방법을 제공해 주었고, 무엇보다 창조적 상상력과 정신적 지구력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내가 30대에 이 서문을 읽었다면 이렇게도 감동했을까? 40대였라면? 아닐 것이다.
나는 50대가 되어서야 이 서문에 감동할 준비가 겨우 됐던 사람이다.
나는 이분에 비하면 너무나 평온하고 아늑하고 안정적으로 살아왔다.
나도 아버지를 암으로 잃었지만 내 나이 마흔이 넘어서였다. 나 자신도 암에 걸리지 않았다. 가족이 실종되는 일도 없었다. 빈곤하지도 않다. 노년에도 빈곤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사는 게 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출퇴근하고 월급 받고 가족들과 모여 놀고먹고 마시고 자다 보면 일주일이 가고 한 달이 가고 일 년이 가는 지극히 안온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럼에도 이 서문에 감동할 준비가 됐다는 것은, 누구나 그러하듯이, 나이 반백년을 살아오다보니 나 또한 나름대로 힘들었기 때문이다. 물 한 잔 편히 마실 틈을 내지 못한 채 하루가 흘러가기도 했고, 신생아 아들에게 주기적으로 수면제를 먹여야 했던 적도 있고, 30분 넘게 코피 흘리는 아이를 홀로 두고 어금니 깨물며 출근해야 했고, 전 재산을 모두 빼앗길 뻔한 사건도 있었고, 지긋지긋한 불화로 가정을 깨버릴까 싶었던 적도 있고, 개복 수술을 연달아 두 번 한 적도 있고, 그 후유증으로 완전 금식으로 병원에 3주 동안 갇혔던 적도 있다.
그렇게 40대까지 보내고 50을 넘긴 어느 시기부터 삶에 대해 분노와 억울이 마구 치밀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예전에 화가 나지 않았던 일들도 하나하나 떠올리며 화를 내고 있었다. 그때 이 책을 만났다. 딱히 잘못된 것도 없는 평탄한 나날이었던 2018년 가을 어느 날에도 나는 분노가 치밀고 후회가 복받쳐 있었다. 그날 저녁 도서관에서 이 책을 발견했다.
표지에서 차미례를 보고 혹시나 하며 책을 펼쳤고 이어 역자 서문의 제목 ‘34년 버티기’가 눈에 들어왔다. 선 채로 서문을 일독했고, 첫 페이지도 채 못 넘겨 눈물이 나기 시작했다. 도서관 구석으로 이동해서 계속 훌쩍거리며, 책에 눈물 방울이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하며 읽었다. 빌려와서 서문을 여러 번 더 읽었다. 이후 이틀에 걸쳐 완독 했다. 많은 대목에서 나도 차미례처럼 내 인생에 비춰보며 스스로를 달래는 독서를 했다. 마치 어린 시절 동경했던 그 차미례가 책의 이야기를 직접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머리말에 저자가 말했듯, 이 책의 목적은 생존의 구조를 명확히 밝히는 데에 있다.
그리고 저자가 밝히고 차미례가 명심한 생존의 구조란,
존엄을 지키고, 살아남겠다는 믿음을 갖고, 조직을 만들어 연대하고, 협력과 저항 사이에서 생존을 위한 틈을 만드는 것이라고 나는 요약해본다.
씻지 않기 시작하면 존엄을 잃게 되고, 자신의 존엄을 스스로 상실하게 되면 생존에 대한 믿음이 사라지게 되고, 조직에 참여하지 못하고 연대를 이해하지 못하면 고립 속에 죽음을 재촉하게 된다. 저항만으로 살 수 있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적절한 협력으로 시간을 벌어야 한다.
이것은 죽음의 수용소에서 발견한 생존의 구조이지만 인류 전체에게 적용 가능한 생존의 구조이기도 하고 각 개인의 생존 구조이기도 하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 깨끗하게 씻고 단정하게 차려입고 출근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말고, 퇴근 후 요가와 운동도 계속 이어나가야 한다. 늙었어도 깨끗하고 맑은 이미지를 만들어서 죽음과 어둠이 드리우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학교에서는 나에게 주어진 수업과 일을 훌륭하게 해내고 학생들에게 긍정적 피드백과 에너지를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 감사와 배려와 존경으로 인간의 품위를 높이려는 노력과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예술을 즐기며 돈으로 살 수 없는 귀한 경험과 시간을 갖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타인을 존중하고 언제나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협력의 자세는 나이 들수록 더 필요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정한 나의 생존 구조다.
요즘엔 한 걸음 나아가 지구의 지속 가능, 생태와 공존을 위한 노력도 추가해야 한다. 할 일이 많다. 과거를 들춰내어 분노하고 우울해하기에는 할 일이 너무 많다. 지금 하고 싶은 일, 앞으로 해야 할 일, 가슴 뛰는 일거리를 찾는 데에도 24시간이 모자라다.
차미례 님 고맙습니다.
2010년을 한참 지나 2021년에도 역시나 살아 계셔서요.
앞으로 더 오래 살아 계실 거라 믿습니다.
1978년 노량진 어느 구석방에서 선생님 이름 세 글자를 선명하게 보고 기억했던 9살 아이가 이제 생존의 구조를 스스로 만들고 실천하며 아주아주 오래 살아볼 꿈을 꾸고 있습니다.
선생님, 사랑합니다. 언젠가 꼭 뵙고 싶습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