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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Feb 02. 2019

<SKY 캐슬>: 사랑이라는 이름 아래 숨겨진 욕망

드라마 애청자의 애정 담긴 리뷰

  *드라마 내용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그깟 대학 안 간다고 죽어? 엄마 뜻대로 안 산다고 죽어? 그게 어떻게 사랑이야? 날 두고 죽어 버리는 게 어떻게 사랑이냐고.


아이러니하다. 이 욕망 가득한 드라마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말들 중 하나가 사랑이라는 게. 그 말대로라면 드라마 속 스카이캐슬은 사랑이 넘치는 따뜻한 곳이어야 할 텐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 모든 게 그저 드라마 속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도 않는다. 실제로도 많은 부모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한국 교육 입시 제도 아래에서 “다 너 잘 되라고 그러는 거”라며 자녀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을 것이다. 시청자들의 대다수가 우주 엄마보다 더 현실적인 예서 엄마의 입장에 더 많이들 동조하는 것도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많은 부모들은 예서 엄마만큼은 아니더라도, 자녀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신들의 마음이 사랑일 거라고만 굳게 믿을 것이다. 나 또한 그랬으니까.


그런데 나는 이 드라마가 전개되면서 그런 부모의 마음이 사랑이라는 데에 점점 그 생각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를테면 자기 딸이 편의점에서 물건을 훔치는데도 그걸 혼내는 대신 외면하는걸 어떻게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단 말인가. 거기에 예서를 좋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 점점 더 많은 것을 희생시키게끔 몰아붙이는 드라마의 상황 전개는 나 같은 시청자로 하여금 도리어 의문이 들게 만든다:


(서울대 의대를 가기 위해) '정말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 건가?’ 하고.



그리고 그렇게 강요된 선택의 갈림길에서 ‘다 너를 위해서’라던 모성애의 본모습이 드러난다. 이를테면 17화에서 예서 엄마가 딸에게 거의 애원하다시피 호소하는 대목만 보더라도 그렇다:


예서야... 엄마는 네 인생 절대 포기 못해.
돌팔매를 맞든, 조리돌림을 당하든, 우주 엄마한테 짓이겨지든,
그거 엄마가 다 감당할게. 너는 그냥 아무 걱정하지 말고 공부만 해.


대사에서 느껴지는 절절한 감정을 제쳐두고, 가만히 다시 생각해 보면 무척이나 이상한 대사다. 예서의 '인생'을 절대 포기하지 못하겠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뜻일까? 서울대 의대를 못 가는 게 인생을 포기하는 일이라도 된다는 뜻일까? 설령 예서가 나중에 대학을 못 가게 된다고 해도, 그게 어떻게 인생을 포기하는 일이 될 수 있을까?


예서 엄마와 예서에게 있어서 서울대 의대가 이미 단순히 대학 진학을 넘어선 다른 가치를 가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 결국 나는 이 장면에서 예서의 엄마가 포기할 수 없다는 게 사실 예서의 인생이 아닌 그저 자신의 욕망이었던 건 아닌지 되물어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이게 전부 개인의 문제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나는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이 이야기 속의 인물들이 그저 평면적인 악역에 그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자세히 면면을 들여다보면 스카이캐슬 내의 모든 부모들은 자신이 이제껏 받아온 사랑의 형태를 그저 그대로 답습하고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이 드라마 속 비극의 중심에 있던 영재 아빠 역시도 한참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이런 고백을 한다: 자신도 가부장적인 부모 아래에서 자란 탓에 자신의 아들을 대해야 하는 방식을 몰랐었다고.


그런가 하면 또 그놈의 피라미드 밖에 모르는 차 교수는 어떤가. 어쩌면 그 역시 자신이 힘든 성장 과정을 거쳐 왔기 때문에, 자신의 자녀들에게만큼은 좋은 것만을 물려주고 싶어 하는 걸지도 모른다. 그 마음이 마치 초식동물에게 고기를 권하는 것처럼 삐뚤어진 형태의 사랑, 또는 여느 노래 제목처럼 그저 ‘fake love’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문제였다면 문제였겠지만 말이다. 결국 그의 자녀들은 모두 그와 함께 있는 게 행복하지 않다며 그를 외면한다. 그런 그의 잘못된 사랑, 아니, 뒤틀린 욕망은 결국 그를 그가 그토록 애정 하던 피라미드와 함께 고독하게 남겨지게 만든다.


이런 엇나간 부모-자식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강준상 캐릭터가 아닐까 싶다. 이 드라마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수 없는 인물인 줄로만 알았던 그 역시도 결국에는 (예서 엄마와 같은) 욕심 많은 부모의 희생양이기도 했다는 걸 보여준다. 그래서인지 부모의 욕망에만 충실히 따르느라 "내일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이 되어 버렸다는 강준상의 고백이 너무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이 판국에도 체면이 중요하세요? 날 이렇게 만든 건 어머니라고요. 내일모레 쉰이 되도록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도 모르는 놈을 만들어놨잖아요.


이런 강준상의 모습은 향후 예서와 같은 아이들의 미래처럼 보이기도 한다. 돌이켜 보면, 이 드라마 내내 나오는 예서의 서울대 의대 진학에 대한 얘기에도 정작 예서의 행복에 대한 이야기는 빠져 있었으니까.


의대만 가기만 하면 ‘저절로 행복해질 테니까’ 괜찮다고 넘기기에는 이미 영재네 가족과 같은 비극이 한 번 있었더랬다. 그리고 그렇게만 생각하기에는 이제껏 예서가 포기해야 했던, 그리고 앞으로도 포기해야 할 것들이 너무 많다. 급기야 예서는 한동안 다른 무고한 사람을 살인죄로 몰아갔다는 죄책감을 지게 되었으니 말이다.



김주영 선생 역할을 맡은 배우 김서형은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드라마의 대사로 (영재 부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을 꼽았다고 한다:

자식이 돌아올 때까지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렸어야죠. 아니, 자신들의 욕심을 내려놓고 영재가 뭘 선택하든 받아들일 준비를 했어야죠. 그게 부모 아닙니까?


"그게 부모 아닙니까?"라는 대사에서 나 역시도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된다. 어쩌면 김주영 선생의 말대로 영재네 부모님은 영재를 그저 믿고 기다렸어야 하는 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래서’보다 더 많은 ‘그럼에도 불구하고’로 이루어진 말이기에. 그래서 나는 사랑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은 믿음일 거라고 생각한다.


다행히 예서 엄마는 결말에 가까워진 19화에 되어서야 예서가 자퇴를 하거나 퇴학을 당하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 예서를 사랑한다, 고 말한다. 그리고 예서가 그 이후에 몰아닥칠 풍파를 견뎌내고 자신의 실력을 직접 증명해 보일 거라는 말을 믿는다.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나는 그 장면에서 처음으로 그 두 모녀가 진정으로 행복해 보인다고 느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예서네 가족만큼은 행복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많은 대한민국의 청소년들과 그 부모들 역시 성공하기 이전에, 행복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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