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퇴직 후 3주 정도 업무를 넘겨주느라 간헐적으로 사무실에 나갔다. 어느 순간, 그만 나와야겠구나 싶은 마음에 남은 짐을 챙겨 나온 지 월화수목 나흘째다. 망망대해처럼 펼쳐진 나만의 시간이다. 출근하지 않은 나흘의 시공간이 아득히 멀어 오백 년은 된 듯하다. 눈을 뜬 채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 어떤 의미인가, 좋기만도 싫지만도 않다. 좀 당황하는 중이라고 할까. 당연히 적응시간이 필요하겠다. 이젠 지금까지와 다른 시간을 보내야 한다. 어제오늘 전 직장 관련해 전화를 받았다. 아직 퇴직한 줄 몰라서 한 통, 무심해서 걸려 온 한 통이다. 다들 출근했겠네, 점심시간, 한창 지루할 오후 서너 시, 퇴근할 시간이군. 아직은 이렇게 근무시간에 의식이 가있다. 곧 무심히 익숙해지고 한 달이 하루 같기만 한 때가 올 것이다.
툭하면 가라앉고 쉽게 처지는 스스로를 아는지라 나름으로 퇴직 후를 준비하였다. 행정복지센터(주민센터) 문화강좌 중 일주일에 두 번 요가와 영어교실을 등록했다. 집에서 보낼 많은 시간을 생각해 낡은 화장실도 산뜻하게 수리했다. 그리고 오래전부터 꿈꾸며 기다려왔던 40일 넘는 산티아고 도보순례를 예약했다. 이루고 싶은 일의 방향을 잡고 보니 알 수 없는 활기가 막연한 두려움에 앞선다. 걷기를 중요한 하루일과에 넣고 중요과제로 삼았다. 처음엔 1∼2km 걷기에도 결심이 필요했고 얼마 걸으면 그 시간만큼 쉬어야 기력이 회복되었다. 집을 중심으로 해서 사방 걷기 그물망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솔숲공원은 집에서 가까워 쉽게 다가갈 수 있지만 둘레가 넓지 않아 쳇바퀴 돌 듯 걸어야 하니 재미가 없다. 걷기에 의미 부여하면 움직이기가 쉽다. 영어교실이 있는 행정복지센터까지 도보거리가 3km 된다. 미산로와 찬우물길을 걸어 제2경인고속도로 위를 가로지르면 은계로와 만난다. 은계남길 따라 검바위초등학교 앞을 지나서 두 정거장쯤 가면 은계도서관 옆 은행동행정복지센터가 보인다. 돌아오면 6km.
우리 동네 유일하게 정육, 야채, 과일, 생필품을 갖추고 할인마트라 이름 붙인 슈퍼가 있다. 어지간하면 그곳을 이용했다. 곧 도착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계산을 부탁했다가 황당한 대접을 받았다. 아랫사람 야단치듯 대하는 태도에 몹시 당황했었다. ‘기분 안 좋은 일이 있으셨나? 뭐 그럴 수도 있지’ 하며 내 마음을 달랬다. 잊은 듯 시간이 흐르고 어느 날, 물건 두어 가지 골라서 계산대 앞으로 갔다. 주인이라 알고 있는 그 사람이 휴대폰으로 동영상을 보고 있는 듯 보인다. ‘계산이요’ 말했다. 반응이 없다. 내가 작게 말했나 싶어 ‘계산해 주세요’ 분명하게 거듭 말했다. 마지못해 하는 태도로 계산을 한다. 뭐야 이 사람, 기분이 확 나빠지면서 지난번 일까지 고개 빼든다. 어이가 없었다. 그리고 결심했다. 이 슈퍼를 다시 오면 사람이 아니다.
포동에 있는 슈퍼까지 도보로 2km이다. 하중동 동아아파트 앞 슈퍼는 3km 된다. 걷기에 진심이기로 한만큼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다. 시흥대로 따라 걷는 신작로 걷기는 어딘가 불편하다. 신현로로 갈라지는 초입에 슈퍼가 있다. 조금 더 들어가면 농협이 나오고 더 내려가면 요가하느라 일주일에 두 번 오는 신현동행정복지센터이다. 하중동 슈퍼는, 호조벌 논길로 KBS송신소 철망울타리 따라가다가 하중로 접어들어 수타박사 앞 하중교를 지나 한 정거장 정도 더 걷는다. 털털거리는 시골버스 달리는 정취로 소소한 정겨움이 있다. 멀게 느껴지던 신천동 삼미시장도 지름길인 골목길을 따라가면 3.5km 된다. 시장을 찾아가다 발견한 슈퍼맨식자재마트는 마치 새로운 대륙을 발견한 느낌이랄까, 좀 과장하면 그랬다. 삼미시장에서 더 나아가면 소래산, 은계중앙로에서 더 나아가면 은계호수공원까지 갈 수 있다. 힘에 부치면 돌아올 때 버스를 타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다.
요즘 가장 선호하는 길은 호조벌을 앞마당처럼 걷는 ‘경기둘레길 시흥 54코스’ 중 일부구간이다. 포동수로에 놓인 경관보행교 건너 은행 8교까지 걸어 유턴해 돌아온다. 은행 8교를 넘어가 제2경인고속도로 고가 밑으로 나가면 은계중앙로와 만난다. 경기둘레길은 경기도 15개 시군이 협력하여 경기도 외곽을 도는 전체 60코스로 총길이 860km이다. 평화누리길, 숲길, 물길, 갯길 등 4권역으로 분류하였다. 이 중 시흥은 52부터 54코스로 경기 갯길에 들어있다. 54코스는 시흥연꽃테마파크에서 시작해 부천소사역이 종점이다.
생활권 길이 아니라 마을과 떨어져 있고 어딘가 휑한 주변 탓인지 사람은 많지 않다. 먼저 넓은 시계와 그 공간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자유로운 바람을 만난다. 3월 하순, 대지가 움쑥움쑥 거리는 게 느껴진다. 일부 논이 논갈이로 뒤집어지고 밭에는 고랑을 타라 검은 비닐이 씌워지고 있다. 수십 마리씩 논바닥에 앉았다가 일시에 날아오르는 새들의 괴성이 뭐라는 건지 궁금하다. 바싹 말라있던 수로가 곧 다가올 모내기를 위해 몸피를 넓히고 있다. 곁가지로 빠지는 논의 물길을 따라 일정 길이로 물을 받는 게 보인다. 논둑 옆 버드나무가 연두색으로 가지를 물들이고 벚나무는 꽃망울을 풍선처럼 부풀리고 있다. 모두가 아주 더디지만 조용히 천천히 꾸준히 일정하게 어딘가로 가고 있다.
뒷골목으로 밀려난 곳이라 여겼던 내 보금자리 가까이 보물이 있었다. 매일 다른 얼굴로 서성이며 기다린다. 걷기를 일상의 여백으로 둔다. 중구난방 삐져나오는 잡다한 생각을 간추리기에 알맞다. 가끔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튀어나오기도 한다. 돌아보면 다행히 아무도 없다. 물오리, 백로, 왜가리가 들었을까. 머쓱한 눈길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