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껏해야 한 번이지만 여권이라는 것을 들고 출국하는 경험을 해봤다 이건가, 아니면 여행 계획을 일찌감치 2달 전에 다 짜 놨기 때문인 건가. 비교적 긴 여행인 만큼 큰 여행가방을 들고 일본 후쿠오카 공항에 내리기 전까지 이상하리만큼 설렘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다. 입국장을 나와 일본어가 가득한 간판들을 보고 - 아직까지 귀로는 우리나라 말이 더 들렸던 것 같다 - 우리나라와는 다른 미묘한 공기를 느끼자 '아 이거다' 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이번 여행은 지난 일본 여행의 영향이 컸던 것 같다. 지난 교토에서의 기억이 너무 좋게 남아서, 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지만 생애 2번째 해외여행을 다시 교토로 갈까 고민했을 정도였으니까. 다행히(?) 정신을 차리고 규슈와 홋카이도, 주부(나고야)를 저울질하다가 언제나처럼 가장 저렴한 항공권을 사놓고 계획을 짰다. 가능하면 번화가나 유명지에서 멀리, 시골이나 동네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주택가 위주로. 그러니 나중에 혹시 누가 나에게 다자이후, 유후인, 구마모토 등을 물어보면 '몰라..' 할 수밖에 없겠지.
나는 항상 돈을 조금 더 쓰더라도 새벽이나 아침 비행기를 타고 여행을 시작했었는데, 이번에는 어쩌다 보니 저녁 비행기를 타고 떠나게 됐다. 게다가 공항으로 가는 길도 흐리고 후쿠오카(福岡)도 비 예보가 있어서 더욱 설렘이 덜했던 것 같다. 비행 내내 함께 앉은 노부부와 대화를 하면서 왔는데, 일본어도 못하는 군인이 카메라 들고 혼자 간다고 하니까 멋있다면서 나에게 질문을 많이 하셨다. 단 둘이서 불편한 버스와 기차를 번갈아타고 일주일 넘게 관광지, 온천을 찾아다니실 두 분이 더 멋있어 보이던데.
흐리긴 하지만 전 날 늦게까지 내리던 비는 그친 아침이었다. 숙소의 공용 샤워실에 작은 탕이 있어 몸도 담갔다가 나오니 간만의 이른 아침인데도 몸이 가벼웠다. 시내 한가운데 버스정류장 출근하는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니 교토에서의 매일 아침 그 느낌이 되살아났다. 나는 바쁘지도 않고 출근하는 것도 아닌데. 이 느낌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그리고 첫 목적지인 유센테이(友泉亭) 공원으로 향했다.
공항 때문에 반강제로 이틀을 보내야 했던 후쿠오카에 유센테이 공원이 있는 건 나에게 가뭄 속 단비 같았다. 게다가 교토에서 제일 좋았던 오하라(大原) 느낌이라니. 여기는 비가 오더라도 꼭 가야겠다 다짐하며 계획을 세웠었다. 그 의지 때문인지 공원이 9시 개장이었는데 20분 정도 일찍 도착해서 동네를 한 바퀴 돌다가 들어갔다. 9시 5분에 들어갔는데 평일 이른 시간이라 다른 관광객 없이 1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넓은 공간을 나 혼자 즐겼다.
입구에서부터 만나는 직원 분마다 먼저 '오하요 고자이마스'하고 한마디 인사를 했는데 다들 활짝 웃으며 일본어로 막 얘기를 하셔서 그제야 영어로 일본어 못한다고 했다. 어떤 직원 한 분은 피규어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조용히 다가오셔서는 옆 나무에 있는 이끼를 가리키며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으셨다. 어찌나 열정적이시던지, 차마 중간에 말을 끊을 수가 없어 얘기를 다 듣고 나서야 '스미마셍.. 와따시와 칸코쿠진 데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다. 이번 여행 내내 현지인 분들이 아무렇지 않게 혼자 있는 나에게 일본어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문에 '오하요', '곤니찌와' 같은 간단한 인사도 영어로 하며 일본어 못하는 관광객 티를 내야 하나 하고 나름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유센테이 공원은 교토의 오하라처럼 산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변에 주택이 가득한 동네 한가운데에 있는데도 주변의 소음이 하나도 들리지 않는다. 폭포 소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 소리, 아침 새소리와 함께 가만히 앉아 천천히 흘러가는 1700년대 신선놀음을 경험한 것 같다.
버스를 타고 돌아와서 텐진에 있는 유명한 함바그 집 '키와미야(極味や)'에 갔다. 11시면 점심으로는 이른 시간이라 괜찮겠지 하고 갔는데 대기줄이 하나도 안보였다. 종업원에게 혼자 왔다고 하니 내 뒤를 가리키는데, 통로 반대편에 30명 정도가 줄을 서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도 밥을 기다려서 먹진 않는데 여행까지 와서..라고 생각하다가 대기줄 대부분이 현지인들이라 나름 기대를 하고 기다려서 먹었다. 처음엔 와 맛있다 하고 먹었는데 이후에는 자리가 불편했던 것 밖에 기억이 안 난다.
쇼핑을 딱히 좋아하지도 않고 필요한 건 마지막 날 숙소 근처 드럭스토어에 가서 한 번에 사 오면 되었기에 후쿠오카에서는 정말 할 게 없었다. 그래서 알아본 것이라고는 후쿠오카에서 나름 유명하다는 카페들이 전부였다. 이 날은 유센테이 공원에 다녀와서 오후에 고양이 섬으로 유명한 아이노시마(相島)에 갈 계획이었는데, 소나기가 온다기에 일찌감치 포기를 해버리고 카페들을 돌아다니기로 했다.
버스를 타도 되는데 괜히 터덜터덜 걷다가 보인 6층짜리 loft에 들어가 구경도 하고 첫 카페인 스테레오커피(StereoCoffee)를 찾아갔다. 아침부터 꽤 많은 거리를 걸었기에 여유롭게 커피 한 잔 하면서 쉬다가 나와야지 했는데 웬걸, 카페에 의자가 없다. 주문한 커피를 기다리면서 '우리나라 서서갈비 같은 건가', '이탈리아는 커피를 서서 마신다는 얘기를 들어본 것도 같은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발바닥이 아파서 커피고 뭐고 앉아서 쉬고 싶었다. 그런데 이 카페는 뭔데 커피는 맛있고 좋아 보이는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는 끝내주고 분위기가 있는 거지. 결국 30분을 (못 쉬고) 즐기다가 나왔다.
이 근처가 '야쿠인(薬院) 카페거리'라고 하더니 주택가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카페 몇 개가 전부였다. '보정동 카페거리' 같은 걸 상상했는데, 내가 잘못 찾아간 건지. 지나가는 길에 요새 핫하다는 '아베키(abeki)'와 '노 커피(NO COFFEE)'도 봤지만 자리가 많지 않아 보여서 그냥 지나치고 '새터데이앤레디(Saturday . AND READY)'에 자리를 잡았다. 이 주변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카페 손님들 중 대부분이 우리나라 사람들이었다. 근처 구석에 있는 편집샵에서도 한글을 보기도 하고. 나만 이런 골목길을 막 쑤시고 다니는 게 아니구나.
파파라이라이(papparayray). 여러 카페들 중에 제일 기대했던 곳이었는데 걷고 또 걸어 찾아와보니 닫았다. 분명 여행 전에 블로그를 찾아봤을 때는 화/목 휴무였는데, 잠겨진 자물쇠를 마주하고 공식 홈페이지를 찾아보니 목/금 휴무다. 대문에는 영업시간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이고 언제 휴무인지, '오늘은 쉬는 날!' 안내라든지, 뭐 아무것도 적혀있지 않다. 그냥 자물쇠로 닫혀있다. 불친절하다. 기다려 나 다시 온다.
지난 여행에서 너무 맛있게 먹었던 이치란 라멘의 본점에 가서 저녁을 먹고 지하철로 1시간 반을 달려 가라쓰(唐津)로 넘어왔다. 여행가방 끄는 소리가 미안할 정도로 조용한 동네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