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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스텔에서 조식을 먹고 나와 메가네바시(眼鏡橋)로 이동했다. 이동하면서 처음으로 노면전차를 타보았는데, 이건 버스보다 흔들리고 시끄러운데 지하철보다도 흔들리고 시끄러웠다. 버스보다 조금 더 저렴하면서 어딜 가든 추가 요금 없이 기본요금이라는 점 말고는 딱히 나은 점이 없는 것 같다. 전차도 승용차와 같이 교차로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건 좀 귀여웠다. 여행 전에는 다리 하나를 보려고 여기에 가야 하나 라고 생각했는데, 호스텔 직원분이 이 동네에 절도 있고 바로 옆에 식당과 쇼핑몰이 모인 번화가가 있다고 추천하길래 구라바엔(グラバー園)을 포기하고 메가네바시를 택했다.
나카시마 강에서 돌이 깔린 길을 따라 올라가면 길을 따라서 절 여러 개가 늘어서있다. 그냥 평범한 절 같아 보이는데 다들 입장료를 받길래 들어가 보지는 않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근처 절과 주택가에 여러 색깔이 들어간 끈이 여기저기 매어져 있었다. 어떤 절과 주택에는 빨간색 끈이, 다른 절과 주택에는 파란색 끈이 매어져 있다. 처음에는 센스 있고 재미있는 모습에 웃으면서 지나갔는데, 나중에는 이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졌다. 한 절이나 주택에 여러 색깔의 끈이 동시에 있지 않은걸 보고, 빨간색 끈이 매어진 절에 다니는 사람은 집에 빨간색 줄을 매어놓고 이런 식이 아닌가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 구글에서 한참을 검색해보았는데, 이 끈 사진이 딱 1장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것도 올해 9월인걸 봐서는 이게 오랜 전통이거나 한 건 아닌 듯싶다. 너무 궁금한 나머지 나가사키 관광 홈페이지 5군데에 메일을 써서 보냈는데 일주일째 답장이 오지 않고 있다. 혹시 저 끈에 대한 의미를 아시는 분은 댓글로라도 알려주셨으면 좋겠다.
절과 나카시마 강을 따라 동네를 한 바퀴 돌고 메가네바시 옆에 있는 벤치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냈다. 관광지로써의 주변 느낌은 교토(京都)의 철학의 길(哲学の道)과 비슷한 것 같은데, 적어도 이 곳에서는 길을 막고 사진을 찍는다거나 소리를 지르며 일행을 부르며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는 관광객은 보지 못했다. 개인적으로는 (식당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1시간을 앉아있는 동안, 철학의 길보다 훨씬 여유롭고 기분 좋은 분위기를 느꼈던 곳이었다.
초딩 입맛에다 평소 맛을 크게 따지지 않고 밥을 먹기 때문에 여행 중에 한 식사에 대해서는 사진이나 글을 잘 남기지 않았는데, 여기는 짧게나마 글을 남기지 않고는 넘어갈 수가 없다. 점심은 뭘 먹을까 하며 강가 벤치에 앉아 대충 찾아 방문한 이 집이 내 인생 돈가스 집이 될 줄이야. 오픈 시간에 맞춰 들어가 앉아 곧 주문한 돈가스가 나오고, 기록용 사진을 남길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돈가스이겠거니 했다. 그런데 한 입을 먹는 순간 '살면서 음식을 먹고 감동이란 것을 해본 적이 있었나'하고 인생을 되돌아보게 하는 맛이었다. 과장 하나 없이, 식사를 마치고 나오면서 이 돈가스를 먹으러 나중에 다시 나가사키에 오겠다고 다짐까지 했다.
식사를 마치고 이번에는 카페 오픈 시간을 기다리며 동네를 빙빙 돌았다. 옷가게에 가서 옷 구경도 하고, 돈키호테에 가서 코로로 젤리도 가방에 보충해놓고. 1시가 되자마자 문이 열린 카페에 들어갔는데, 카페 문을 열자마자 최소 몇십 년 이상은 된 듯한 나무와 먼지 냄새가 확 느껴졌다. 인테리어와 소품들로 빈티지한 옛날 느낌을 흉내 낼 수는 있겠지만 실내 전체적으로 퍼져있는 냄새는 말 그대로 '혼모노(ほんもの)'였다. 내 나이보다 2배 이상 오래된 듯한 벽시계와 소품들, 삐그덕 대는 바닥, 테이블, 의자. 그리고 이미 이 가게 인테리어의 부분이 되신 듯 분위기 있게 수염까지 기르신 사장님까지. 이보다 더 완벽한 엔틱 카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숫자와 영어 몇 글자를 빼고는 읽을 수 있는 것이 없었던 메뉴판을 들고 조심스럽게 가서 '아노.. 호또... 코히? 드립? 케냐?'하고 주문을 했다. 사장님께서 주문을 받고 나한테 '대한민국?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대한민국'이라고 부르는 건 처음 봤다. 허허. 그리고 영어로 대화를 짧게 나누었는데 분위기와는 다르게 굉장히 쾌활하신 분이었다. 자리에서 커피를 홀짝홀짝 마시며 분위기를 한껏 만끽하고 있는데, 뒷 테이블에 어떤 아주머니가 앉으시더니 줄담배를 피우셨다. 그 모습이 카페 분위기와 제대로 어우러져서 영화 <범죄와의 전쟁>의 여사장을 떠올리게 했다. 그것도 잠시, 여사장이고 뭐고 담배냄새를 참고 참다가 커피 맛을 느낄 수 없을 정도가 되자 우리나라의 실내 금연법에 새삼 감사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가 역에 도착하자마자, 역에서 5초 거리에 있는 숙소에 체크인을 하고 사가시 역사민속관에 가기 위해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다. 거리가 좀 있어 버스를 타려고 했는데 30분 이상 기다려야 하길래 20분 거리를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동네가 좀, 내가 상상했던 분위기와는 많이 달랐다. 태풍이 오고 있는지 많이 흐리고 비가 흩뿌리기는 했지만, 일요일 오후 4시인데 문을 연 가게는 찾아볼 수가 없고 거리에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걷다 보니 뜬금없이 유흥주점이 즐비한 거리가 나타나기도 했다.
사가시 역사민속관은 한 개의 건물이 아니고 여러 근대 건축물들이 모여있는 건물 군(群)이다. 비바람을 뚫고 목적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보인 구 고가 은행으로 들어갔다. 며칠 전 가라쓰에서 갔던 구 가라쓰 은행과 비슷한 느낌을 기대하고 안으로 들어갔는데, 웬 밴드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공연을 한다고 유물이 있는 방이나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을 몽땅 막아놨다. 거기에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할 수 없을 정도로 시끄러운 음악소리까지 더해져 잠깐 사이에 어이가 몽땅 털려버린 채 밖으로 나온 나는, 여전히 멋있었던 은행 건물 외관을 보며 겨우 정신을 차렸다.
구 고가 은행을 나와서 다른 옛 건물들을 찾아 나섰다. 분명히 이 근처에 옛 저택들 여러 개가 모여있다고 했는데, 지도를 보며 동네를 2바퀴를 돌았는데도 찾을 수 없었다. 게다가 겨우 찾은 박물관은 폐관 시간이 20분이나 남았는데 이미 닫은 채였다. 휴관일, 폐관 시간까지 다 알아보고 계획을 짰는데 하루 오후 일정을 이렇게 다 날려버리니 너무 허무했다. 결국 아무것도 구경하지 못한 채 비바람에 옷까지 홀라당 젖고 지쳐 숙소에 돌아갔다. 저녁은 태풍이 지나가는 바람에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침대에 누워 여행하느라 못 본 예능들을 몰아서 봤다. 오후의 경험 때문에 이 동네에 대한 불신이 자리 잡아버려서, 어차피 레일패스도 있겠다 다음 날은 그냥 나가사키에 다시 가서 돈가스나 또 먹고 올까 싶기까지 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