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유치진지한 여행기 - 요론 섬&오키나와 (1)
요론에서의 둘째 날. 오전 10시가 되어갈 때쯤 느지막이 일어나 천천히 씻고 숙소를 나섰다. 전 날의 흐린 하늘과 낮게 흐르던 구름은 온데간데없고, 파란 하늘과 조각구름이 스쿠터를 타고 달리는 나를 맞이해줬다. '현실' 정오에 가까운 시간에 '상쾌한 아침' 같은 표현은 좀 민망하겠지만, 요론에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침이든 점심이든 한가하고 여유롭기는 마찬가지고, 나를 신경 쓰는 사람도 없으니 말이다. 심지어 숙소 사장님도 내가 아침에는 늦잠을 자고, 밤에는 자정이 지난 시간에 카메라를 메고 나가는 걸 보고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으신다. 언제나 굿모닝, 굿나잇.
텅 빈 도로를 천천히 달려 전 날 들르지 않았던 요론의 시내에 들어갔다. 요론 정(町)사무소를 중심으로 식당, 카페, 마트, 이자카야 등이 늘어서 있다. 말이 시내지 시골의 읍내 정도를 생각하면 적당하겠다. 일본어를 못 읽으니 식당과 이자카야 구별도 잘 되지 않고, 뭘 파는 곳인지 알 수도 없어(구글 지도와 트립어드바이저도 무소용) 간단한 식사나 브런치를 함께 하는 카페에서 끼니를 대부분 해결했다. 그리고 밤늦게 어두운 시내 골목을 다니다 보면 드문드문 불 켜진 이자카야에서 시끌시끌한 노랫소리가 흘러나오기도 한다.
시내 바로 옆에는 작은 배들과 어선들이 서 있는 작은 선착장이 있다. 섬에 널린 게 해변인데 선착장 물을 굳이.. 라고 생각하기엔 멀리서 보는데도 바다에 눈을 뗄 수가 없어 홀린 듯이 스쿠터를 끌고 선착장 안쪽 깊숙이까지 들어갔다. 내 발 바로 아래서 찰랑거리고 있는 걸 보고 있는데도, 누가 바다에 페인트를 잔뜩 풀어놓은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믿을 수가 없는 색이었다. 멀리서 보면 청량한 빛을 띠고, 몸을 수면 가까이 숙여 내려다보면 수심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맑은. 요론에 있는 동안 많은 해변과 바다를 경험했지만, 차바나 항의 이 바다는 오랫동안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을 것 같다.
우도노스 해변은 차바나 항 바로 옆에 위치한 넓은 해변이다. 역시 시내 바로 옆이라 시내에 올 때마다 꼭 한 번씩 눈도장을 찍고 갔다. 해변이 서쪽을 향하고 있어서 일몰 때 풍경과 분위기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다른 해변들에선 사람 구경하기가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낮에 스노클링 하는 사람들, 저녁에는 개와 같이 산책하는 사람들을 가끔 볼 수 있었다.
카페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영화 안경에서 주인공이 묵었던 숙소 '하마다'의 촬영지 '요론토빌리지'를 찾아갔다. 현재는 영화에 나왔던 건물 앞에 큰 메인 건물이 들어섰고, 기존 건물은 펜션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리고 영화에서 매일 아침 주인공 모두가 모여 식사를 하던 주방은 이제 쓰이지는 않지만 그 분위기가 잘 보존되어 있다. '이 분위기에 이끌려서 여기까지 왔지'라는 생각을 하며 주방에도 괜히 앉아보고 정원도 거닐다가 나왔다.
오가네쿠 해변은 이 섬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수 있는 '유리가하마(百合ヶ浜)'를 마주하고 있다. 유리가하마는 오가네쿠 해변으로부터 1.5km 정도 떨어진 해변인데, 봄과 가을 사이 특정 기간의 간조 때가 되면 바다 한가운데에 모래섬과 같이 나타난다. 나는 그 기간에 일정을 맞추지 못해 마지막 날 오전에 겨우 유리가하마를 밟아보고 섬을 떠날 수 있었다. 유리가하마 덕분에 오가네쿠 해변은 다른 해변과 달리 이정표도 많고 해변 입구에 구조물, 심지어는 가판을 하는 할머니들도 있었다. 주차장에 스쿠터를 세우고 해변으로 걸어가는데 그 할머니들이 나를 붙잡았다. 뭘 파시나 하고 봤더니 유리가하마에서 주웠다는 별 모양 모래를 손가락 2마디 만한 작은 유리병에 담아 2~300엔에 팔고 계셨다. 일본어도 못 알아듣고 그냥 가려고 하니 할머니들이 다시 길을 막고 '도쿄? 도쿄?'라고 물어왔다. 그래서 '칸코쿠'라고 대답을 했더니 웬걸, '큐슈? 홋카이도?'라고 다시 물어보시는 걸 보니 할머니들 '칸코쿠'를 모르시는 것 같다...
전 날은 하늘이 회색빛 구름으로 덮여있었지만 이 날은 맑은 하늘이 천천히 주황빛으로 물드는 걸 볼 수 있었다. 초록색 논밭이 어두워지는 걸 보고 있자니, 나는 오늘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도 수고했다고 한마디 해야 할 것만 같았다.
해가 완전히 떨어지기 전에 스쿠터를 타고 우도노스 해변을 향해 달렸다. 낮에 봤던 우도노스 해변은 한없이 청량한 느낌이었는데, 저 멀리서부터 서서히 어두워지는 해변은 어딘가 외롭고 쓸쓸한 느낌이 감돌았다. 그렇게 잠시 해변에 앉아있으니 등 뒤에서 달빛이 해변을 감싸기 시작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