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글 유치진지한 여행기 - 요론 섬&오키나와 (3)
요론에서의 마지막 날. 오후 2시에 오키나와 본섬으로 떠나는 페리를 타기 전에 겨우 유리가하마를 밟아볼 수 있었다. 전 날 저녁에 숙소 사장님이 배가 뜨는지 알아봐 주시고 투어 예약까지 한 번에 해주셨다. 그 덕분에 아침에 일어나 숙소 체크아웃까지 끝내 놓고, 숙소 앞으로 온 픽업 차량을 타고 편하게 투어에 참여할 수 있었다.
픽업 차량이 오가네쿠 해변에 도착해 배를 타기 전에 투어 사장님이 사람들을 모아놓고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셨다. 15명 정도 되는 사람들을 둘러보니 외국인은 나 혼자였고, 사장님은 영어도 아예 못하시는 분이었다. 사장님은 내가 일본어를 알아듣는다고 생각하셨는지 아니면 나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본어로 긴 설명을 끝내셨고 그 설명을 듣자마자 사람들은 하나둘씩 스노클링 장비를 챙기기 시작했다.
나는 물속에 풍덩 까지 할 계획은 없었기에 투어를 잘못 찾아왔나 하는 생각을 하며 멀뚱멀뚱 서있었다. 그런 나에게 한 남자가 다가와서 '외국인이냐, 어디서 왔냐'라고 영어로 물어왔다. 나에게 한줄기 빛 같았던 그 물음을 듣자마자 난 다급하게 '나는 한국에서 왔는데 일본어를 아예 못한다. 혹시 나를 좀 도와줄 수 있냐'라고 했다. 그러자 그 남자에게서 한국어로 대답이 돌아왔다. 나는 그 상황이 이해가 잘 되지 않아서 순간 정지해 있었는데, 중간에 물속에 들어가지 않고 배 위에만 있어도 된다는 그 남자의 설명에 장비를 챙기지 않고 일단 배에 올라탔다.
그 남자의 일행들과 함께 배에 타고나서야 제대로 인사를 하고 서로를 소개할 수 있었다. '사토'라는 이름의 그 남자는 오키나와에 사는 일본인인데, 옛날에 한국인 친구가 여럿 있어서 그 친구들한테 한국어를 배웠다고 했다. 한국에 살아본 적도 없고 따로 학원을 다닌 것도 아닌데 영어를 섞지 않고 한국어로만 의사소통이 될 정도로 한국어가 유창했다. 자기도 오랜만에 한국어를 쓰니 좋다면서 투어 내내 내 옆에 붙어서 자기 일행과 사장님이 하는 말들을 동시통역까지 해줬다.
유리가하마 투어는 해변에서 곧장 유리가하마를 찍고 돌아오는 게 아니라, 주변 바다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중간에 배를 세워 스노클링을 할 수 있는 시간도 줬다. 배를 세워줬을 때는 나와 사토 상의 아내분 빼고 모두가 바다로 뛰어들었다. 뒤처리가 귀찮아서 물에 들어가는걸 별로 안 좋아하는데 그 순간은 좀 아쉬웠다. 투어에 이런 시간이 있다는 걸 미리 알았다면 옷을 하나 더 챙겨 왔을 텐데.
유리가하마는 조수의 차에 의해 나타나기 때문에 특정 기간에만 볼 수 있다. (요론 섬 공식 관광 홈페이지 http://www.yorontou.info/에 가면 유리가하마 출현 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갔던 날은 유리가하마 출현 기간의 첫날이었기 때문에 모래가 수면 위로 드러나지는 않고 발목 정도까지는 물이 찼다. 바다 한가운데에 서서, 사방의 바다를 둘러보는 기분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이상하고,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토 상 일행과 사진도 찍고 찍어주고 하면서 함께했기에 더 즐거웠는지도.
유리가하마 투어가 끝나고, 나는 투어 픽업차량 대신 사토 상 일행의 차를 함께 탔다. 사토 상이 요론에 살고 있다는 일행의 집에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는데 배 시간 때문에 안타깝게도 나는 숙소에서 내려야 했다. 2시간 남짓한 투어 시간 동안 많은 대화를 나누고 놀며 친해졌더니 우리 넷 모두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던 것 같다. 이메일 주소를 주고받으면서 혹시 한국에 놀러 오면 내가 대접을 하겠다는 말과 함께 다음을 기약했다.
다시 나하로 돌아온 이튿날은 너무너무 더웠다. 기온은 30도씨 초반이었지만 바다 옆이라 그런지 높은 습도에 숨이 턱턱 막힐 정도였다. 나하 시내도 이런데 내 발로 또 해변을 찾아가는 건 미친 짓이라는 생각에 원래 계획이었던 미바루 해변(新原ビーチ) 대신 시원한 카페에 앉아있을 요량으로 미나토가와(港川)에 가는 버스를 잡았다.
미나토가와는 1960년대에 미군들의 주거를 위해 단층짜리 호스텔 건물들로 조성되었던 마을이다. 아직까지 주택으로 쓰이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 이국적이고 독특한 레스토랑, 카페, 편집샵 등으로 운영되고 있다. 나는 특색 있는 카페가 많이 있다길래 직접 둘러보고 마음에 드는 카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이 날이 하필 일요일이었다. 오전 11시에 도착했는데도 주차장은 이미 꽉 차있고 이미 자리가 다 차 버린 카페들도 꽤 있었다. 일본어보다 더 많이 들리는 한국어와 중국어 소리를 헤집고 한 카페에 자리를 잡아 그럭저럭 이었던 브런치로 식사를 했다.
브런치를 먹고 나오니 마을에 사람들이 더 늘어나 있었다. 카페 두세 군데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신기한 디저트들을 먹어보겠다는 꿈은 접고, 신기하고 시원한(!) 샵들을 구경하다가 나하로 돌아갔다.
나미노우에 해변은 나하 시내에서 걸어갈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위치해있다. 그러다 보니 여기는 바다, 해변이라기보다는 서울의 한강공원의 느낌이 많이 났다. 노을이 지는 바다를 보면서 맥주를 마신다거나 모래 위에서 공놀이를 하고, 돗자리를 펴놓고 쉬는 사람들을 한참 구경했다.
이번 여행 6박 중에 3박을 나하에서 보냈지만 딱히 재미있거나 좋았던 기억이 없다. 요론에서 보냈던 시간이 상대적으로 너무 좋았기 때문인 걸까? 오키나와 본섬은 혼자 여행하기에 너무 심심한 것 같다는 생각과 요론에서 이틀쯤 더 머물렀으면 좋았었겠다는 생각을 하며 인천 행 비행기에 올랐다.
교토와 바르셀로나 이후로 나중에 꼭 다시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된 요론.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에는, 가방과 마음은 이번 여행보다 더 가볍게 하고 수영복을 챙겨서 보이는 해변마다 몸을 담그고 와야겠다는 다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