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무원 엄마를 변화시켰던 한 권의 책.
좋은 책의 힘을 믿는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좋은 책은 내 삶을 바꾸는
힘이 있다.
비행과 육아를 병행하면서 사실 말하자면 집에 거의 신경을 쓰지 못했다.
아이의 밥과 반찬 준비, 빨래 등 살기 위해 꼭 해야 하는 것들을 우선 신경 써서 해결하고, 나머지 시간은 비행에 필요한 준비와 그리고 비행으로 쌓인 피로를 풀기 바빴다. 늘 여유가 없고, 바빴다. 많은 워킹맘들이 그러하듯이.
리무진 버스시간을 맞춰 타기 위해 케리어와 헹어와 작은 케리어를 낑낑 끌고 7cm 하이힐을 신고 출근을 하기 위해서 10분 단위로 알람을 맞춰 늦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그렇게 탄 리무진 버스에서 숨을 돌리고 브리핑 시트를 보며 비행 준비에 빠진 것은 없는지 보곤 했다.
그렇게 바쁘게 비행을 다녀와서는 짐을 풀지도 못하고 샤워만 한 후 오랜만에 만난 아이와 조금 놀아주고, 아이를 재우기도 전에 내가 먼저 잠들어 버리기 일수였다.
처음해본 승무원 엄마로 산다는 건 꽤나 어려운 일이었다. 한 달에 한국에 있을 수 있는 보장일 수 8일.
그 외에는 당일 비행일 때 잠깐 한국에 머물러 있거나, 동남아 비행 새벽 도착 후 그날 하루와 같이 온전하지 않은 하루까지 따져본다면 한 달에 한국에 있는 날이 15일이 되지 않았다. 보이지 않는 15일 동안 아이는 소리 없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다.
비행을 가기 전날 밤.
아직은 아기 티가 나는 15개월 아이의 눈을 보고 천천히 말했다.
"엄마 내일 비행기 슝 타고 세밤 자고 올 거야. 할머니, 아빠 말씀 잘 듣고 있어. 다녀와서 재미있게 놀자. 엄마가 많이 사랑해."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에게도 꼭 몇 밤 자고 오는지 말해주라며 아기가 있는 친한 선배들이 조언을 해주었다. 엄마가 우주인 아기들한테는 엄마와 떨어져 있는 시간의 공백이 크게 느껴지기에, 엄마가 언제 돌아오는지 말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했다.
아기가 말하진 못하지만 다 듣고 있다는 그 조언은 정말 고마운 조언이었다.
내가 전날 아이에게 말을 하고 다음날 비행 가기 위해 정신없이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나서려고 하면 나의 아이는 정말 말을 다 알아들은 아이처럼 비행 가는 날 위해 손을 흔들어주었다.
아이를 낳고 복직한 지 1년.
사실 어떻게 비행을 다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할 수는 없었다.
한쪽에 치중하는 부분이 생겼고, 나는 그 부분이 비행이었다. 12년 동안 늘 열심히 비행 준비를 했고, 매비행 완벽하게 임하기 위해 빠진 것이 없나 다시 한번 컴펌했다.
사랑하는 친정어머니와 남편의 사랑으로 나는 그렇게 집중해서 비행을 할 수 있었다.
아기를 낳고 기르던 15개월은 보물 같은 아이와 있는 귀한 시간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나 자신은 없어지고 점점 더 아기 엄마로만 살게 되는 시간이었다. 집에 있어보니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일을 해야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그러던 중 복직을 하게 되었고, 오랜만의 비행은 힘들었지만, 해외 스테이션에서 온종일 나로서 있는 시간은 너무도 행복했다.
LA의 햇살을 받으며 시원한 아이스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책을 읽는 시간.
다낭에 가서 맛있는 베트남 쌀국수와 망고주스를 먹으며, 식사 후엔 마사지를 받으며 피로를 풀던 시간들.
로마의 소렌토의 절경을 가만히 마주하며, 마음이 먹먹해지던 시간들.
그렇게 나는 또 에너지를 채우고, 한국에 와서는 아이와 더 질 좋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다.
이번 생에 비행하는 워킹맘은 처음이라 너무 행복하기도 때론 육아와 비행을 동시에 하는 것이 너무 벅차기도 했다. 사실 늘 시간적 여유는 없었다.
그러던 중 문득 물건들이 가득 쌓인 옷방에 눈이 갔다. 찬찬히 살펴보니 집안 곳곳 여기저기 쓰지도 않은 물건들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있었다. 여러 개의 비행 케리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 사 온 많은 물건들. 사 올 때는 신이 나서 사 왔지만 늘 정리할 시간과 힘은 없었다. 그렇게 소리 없이 그 물건들은 그 자리가 자기 자리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막상 필요한 물건은 놓을 공간은 부족했다. 물건들이 쌓여가자 내 물건을 놓을 공간이 없어졌고, 남편이 출근할 때 필요한 물건들도 찾기 힘들어하자 맞벌이 부부가 그렇듯 민감해지는 날들이 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내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다.
‘최고의 인테리어는 정리입니다.’
라는 책이었는데,
정리를 전문적으로 하시는
정희숙 작가님이 쓰신 책이었다.
설거지를 하며 오디오북으로 듣고 있는데도 귀에 쏙쏙 들어왔다. 아마도 내가 관심이 생긴 분야기도 했고 내 삶에 바로 접목시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이를 재우며, 하루 만에 책을 다 읽어버렸다.
다음날이 찾아왔다.
짐들로 가득 찬 옷 방문을 열었다.
책에서 말했던 것과 같이 차근차근 내가 사용하지 않지만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것들을 버리기 시작했다. 늘 그 자리엔 그 물건이 있는 것이 당연했기에 사용하지 않아도 미쳐 버려야 한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사용하지 않고 그 공간을 차지하고 있던 많은 물건들 때문에 막상 자주 사용하는 물건들을 놓을 수 없었다. 당연하게 그 자리에 있어왔지만 당연하지 않았던 물건들을 쓰레기 봉지에 담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리하기를 몇 시간 째, 어느새 쓰레기 봉지를 가득 채운 사용하지 않는 많은 물건들이 나왔다.
그렇게 하나둘 필요 없는 것들을 정리해나가자 나에게 너무도 필요했던 공간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너무도 신기했다.
이 많은 공간들이 사실 사용하지도 않는 것들이 모두 차지하고 있었다니- 자리를 들어낸 공간에 나와 남편 그리고 아이가 자주 사용하는 것들을 배치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꼭 필요한 책 한 권을
읽었을 뿐인데, 내 삶이 바뀌었다.
남편 출근용 속옷, 양말, 메리야스가 정갈하게 놓여있고, 분산되어 있었던 비행 갈 때 필요한 아이디카드, 명찰, 윙, 스타킹, 속바지, 메모지, 볼펜이 담길 공간이 생겼다.
아이가 자주 입는 옷과, 속바지, 양말 등
손에 닿는 가까운 곳에 꼭 필요한 것들을 두었다.
그러자 동선은 간결해졌고,
삶이 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늘 좋은 책의 힘을 믿어왔다.
좋은 책은 누군가의 삶에 들어와
그 사람의 삶을 변화시키기에-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
좋은 책의 힘을 다시금 느낀 날.
이날은 꽤 오래도록
내 머릿속에
기억될 것 같다.
(2020.07.07. 화요일의 기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