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혜영(55,여)씨는 요즘 밀키트 고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식자재는 당연히 직접 눈으로 보고 골라야 한다던 정씨지만, 코로나19로 마트 가기가 불안해졌다. 기숙사 생활을 하던 대학생 딸이 들어와 살면서 "기숙사에서 늘 먹던 거 말고 다른 거"를 외치는 통에 끼니마다 메뉴도 고민이다.
그러다 딸의 적립금으로 밀키트를 처음 접했다. 정씨는 "모든 요리를 라면처럼 할 수 있는지 몰랐다"면서 "밀키트는 시간도 수고도 아끼고, 인원수에 맞게 포장돼 나오니 어중간하게 식재료가 남는 것도 없어 정말 편하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전부터 아들, 딸보다 간편식을 더 이용해왔는 주부도 있다. 자녀들이 출가한 뒤 "부엌일은 손절했다"는 박모(55세) 씨는 스무 살 어린 나이에 결혼해 시집살이 하고, 지금까지 자식들 뒷바라지했으면 "이제 부엌일은 할 만큼 했다"는 그다.
은퇴한 남편과 간편식으로 배를 채우고 전시를 보러 가거나 출사(出寫)하러 다니곤 한다. 매년 몇십 포기씩 담던 김장도 안 한다. 대신 김치를 종류별로 조금씩 주문해 먹고 있다. 박씨는 "명절 앞두고 장을 보다 깜빡한 재료가 있었는데 딸이 아예 차례상에 올릴 요리를 주문해줬다"면서 "한번 경험하고 나니,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말했다.
(사진=연합뉴스)
◇5060세대, 코로나19로 자녀와 지내는 시간↑ 간편식·온라인 쇼핑 신세계 '풍덩'
가정 간편식(HMR) 시장의 급성장을 이끈 숨은 대부는 따로 있었다. 활동적인 5060 세대를 일컫는 이른바 '오팔세대'가 코로나19를 계기로 간편식 소비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오팔세대는 '활기찬 인생을 살아가는 신(新)노년층(OPAL·Old People with Active Lives)의 대문자를 딴 신조어다. 다채로운 빛깔을 띠는 보석인 '오팔(OPAL)', 또 '58년 개띠' 등에서 따온 중의적 표현이다.
식품 유통업계는 2010년대 중반부터 증가하는 1·2인 가구나 젊은 층을 겨냥해 간편식을 선보였다. 그러나 정작 활짝 지갑을 연 건 5060세대였다. 은퇴 뒤에도 여전히 사회생활에 참여하거나 자기계발을 이어가면서 손쉽게 한 끼를 해결할 수 있는 간편식을 많이 찾는다는 분석이다. 양적·질적으로 크게 성장하면서 선택의 폭이 넓어진 것도 한몫했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신세계그룹 온라인 통합 쇼핑플랫폼 SSG닷컴에 따르면 지난 2016년 1월 1일부터 지난해 말까지 약 4년간 연령대별 주문 건수를 분석한 결과 50대 이상 고객의 주문 비중이 매년 2~3%포인트씩 늘었다. 특히 주문 비중은 역대 최다인 15%, 매출은 20% 수준에 달했다.
이런 가운데 코로나19는 아직 간편식을 맛보지 못한 5060세대를 온라인 쇼핑으로 유입하면서 이커머스계 '큰손'으로 만들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모처럼 온 가족이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50대 부모가 20대 자녀의 소개로 '쿠팡, 마켓컬리, 네이버 쇼핑'을 경험하는 등 온라인 소비에서도 세대 장벽이 허물어졌다.
◇5060, 주문 건수는 2030보다 적지만 하나를 사더라도 '비싼 것' 한 번에 '많이' 구매
업계에서는 코로나19 이후로는 인터넷·모바일 환경에 익숙하고 구매력까지 갖춘 오팔세대가 핵심 고객층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직접 지은 밥과 반찬을 식탁에 올리는 대신, 가정간편식을 즐긴다. 김장도 굳이 고집하지 않는다. 자녀들이 출가하면서 가구 수도 줄고 은퇴로 소득 수준이 줄어드는 부분도 있다.
5060세대는 IT 기술이나 모바일 기기에도 그리 낯설지만은 않다. 과거 '386'이나 '486', '펜티엄' PC와 젊은 시절을 시간을 보냈던 세대다. 오픈서베이 황희영 대표는 "젊은 세대만 온라인 장보기에 익숙하다는 고정관념을 버려야 할 때가 됐다"고도 덧붙였다.
신선식품 전문 배송업체 마켓컬리에 따르면 코로나가 발생한 지난 1월 20일부터 5월 18일까지 50대, 60대 회원은 전년 동기간 대비 각각 112%, 122% 증가했다. 50대 이상 회원의 매출은 120%가 늘었다. 50대 매출 증가율은 113%, 60대 매출 증가율은 160%로 집계됐다. 50대보다 60대 이상 회원의 증가율도, 매출도 더 높게 나타난 것이다.
특히, 5~60대는 주문건수에 비해 매출 비중은 더 높았다. 마켓컬리 관계자는 "주문건수는 2~30대가 많지만, 매출은 5~60대가 더 많고 50대보다도 60대가 많다"면서 "5060의 구매력이 다른 연령대에 비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 시기에 있는 연령의 고객층이 상당한 구매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고 말했다. 주문 건수가 2~30대가 많긴 하지만 이른바 '머니파워'가 있는 5060세대는 하나를 사더라도 비싼 것을, 또 한 번에 많이 산다는 것이다.
(그래픽=고경민 기자)
◇온라인 쇼핑 맛본 5060, 코로나19 우려로 오프라인 갈수록 회피 '온라인 락인'
코로나19로 맛본 이들의 새로운 경험은 이들을 오프라인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온라인에 묶어 놓는, '온라인 락인(lock-in)'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나이가 들면 면역력이 떨어지기 마련이고, 면역력 저하는 코로나19에 취약하다. 미국 리테일 시장조사업체 코어사이트 리서치(Coresight Research)에 따르면 미국 시민 74.6%는 코로나19 이후 쇼핑센터나 쇼핑몰 매장 방문은 피할 것이라고 응답했다. 대형 쇼핑센터가 아닌 일반상점도 피할 것이라 대답한 사람도 52.7%에 달한다.
이를 연령대별 구분해보면, 18~29세까지는 △쇼핑센터·쇼핑몰 67.9%/ 일반상점 44.7%, 30-44세는 △각각 67.8%/ 55.5%, 45~60세는 △79.3%/ 53.8%, △61세 이상은 85.6%/ 61.1%로 응답했다. 40대 중반부터는 10명 중 8명이 인파가 붐비는 매장은 가지 않겠다고 한 셈이다.
즉 연령층이 높을수록 코로나19와 같은 사태가 지속되거나, 새로운 바이러스가 창궐해 감염위험이 발생한다면, 사람의 접촉이 많은 백화점이나 마트 같은 오프라인 상점 대신에 온라인을 통한 구매할 것으로 예상된다.
◇"오팔세대, 돈·시간· 기다릴 여유도 있다"…빠른 배송보단 가치소비 추구
업계에서 오팔세대를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정보화 혁명 시대에 젊은 시절을 보내고 현재도 상당한 구매력을 갖춘 5060은 매력적인 잠재 고객이기 때문이다. 2030세대에서 이른바 '플렉스'(Flex, 과시 소비) 현상이 일어나곤 있다지만, 일부의 얘기다. 출산율이 내려간 지 오래인 데다 청년실업 심화로 젊은 층은 좀처럼 활력을 찾지 못하고 있다.
5060세대는 직접 지어 먹는 밥과 손수 끓인 국이 당연한 환경에서 자랐다. 그러나 간편식에 대한 인식도 나쁘지 않다.
(사진=연합뉴스)
한돈 대표 브랜드 도드람이 30~50대 주부 1천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HMR 선호도 조사에 따르면 50대 전체 비율 중 55.5%가 HMR 제품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HMR 제품에 대한 향후 구매 빈도 예상 조사에서는 50대의 35.5%가 현재보다 자주 살 것이라고 답변하며 30, 40대보다 적극적인 구매 의사를 밝혔다. CJ제일제당 트렌드 전략팀 관계자는 "HMR 맛 품질이 집밥 수준으로 높아지면서 주부들이 안심하고 식탁에 올리는 것"이라면서 "자녀들이 커갈수록 집밥을 먹지 않자 주부들이 마치 1인 가구와 같은 식생활을 하는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말했다.
특히 웰에이징을 위해 노력하는 오팔세대는 '배송 속도'는 제품을 고르는데 매력적인 기준은 아니다. 빠른 배송보다는 간편식 하나를 고르더라도 건강을 생각하며 꼼꼼하게 상품을 고른다. 당장 내일 새벽에 식탁에 올릴 음식보다는 주요 성분이나 첨가물, 사용된 재료, 비율 등을 하나하나 따져본 뒤 고르는 경향이 크다는 분석이다.
이상근 인천대 산업경영공학교수는 "일본의 '액티브실버'에서 볼 수 있듯이 이들 5060세대나 6070세대는 모든 면에서 젊은 층보다 여유가 있다"면서 "경제적 여유가 있고, 무언가에 쫓기듯 빠른 것만을 찾지는 않는다. 느린 배달도 기다려줄 여유가 있다"고 말했다.
대신 "조금은 더 가치있는 소비를 추구하고, 개인맞춤형 프리미엄 서비스를 더 선호한다"고 강조했다. 즉 오팔세대는 Z세대, Y세대, 밀레니얼 세대와는 분명히 다른 온라인 소비행태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간편식 시장의 '큰손'인 오팔세대를 공략하기 위해서는 이전과는 다른 전략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단순히 소비자를 연령이나 성별, 직업 등을 기준으로 동일 집단으로 나눠 보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이라는 것이다.
황희영 대표도 "코로나19 이전의 일상과 코로나19 이후 일상 사이의 차이는 결국 소비자들이 코로나19 기간 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가 결정할 것"이라면서 "코로나19 이후를 대비하려면 지금 일어나는 변화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