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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연주 Jun 17. 2020

버닝맨_ 첫 번째 이야기

어서 와, 버닝맨은 처음이지?

어느새 여름의 기운이 느껴지는 더운 낮, 빛과 어둠이 반씩 섞인 방 안의 침대에 누워 흘러들어오는 바람을 맞고 있었다. 창문 커튼과 함께 햇빛이 흔들거리고 집 밖의 잔잔한 소음이 창문을 타고 들어오는 나른한 오후였다. 나도 모르게 작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아 버닝맨 가고 싶다.. '




한낮의 무더위와 한밤의 추위가 공존하는 미국 네바다주의 사막 한가운데에 일 년에 한 번, 8월 마지막 한 주 동안 세상 어디에도 없는 도시가 생긴다. BRC(Black Rock City)라고 불리는 이 도시는 돈이 아닌 나눔과 자원봉사로만 운영되며, 누구나 열정적으로 자유롭게 자기를 표현하고 예술가들의 작품과 공연, 그리고 음악을 만끽할 수 있다. BRC 프로젝트의 이름이 바로 버닝맨(Burning Man)이다.

Burning Man, ,2019

꿈의 도시 같은 버닝맨에 관해 수년 전 듣고 난 뒤 꼭 한번 가보고 싶다는 마음에 사로잡혔다. 그러다 작년 여름, 드디어 그 꿈을 실현하게 되었다. BRC 입장 티켓을 구하는 것부터 난항이었던 버닝맨의 여정은 수개월을 기다린 끝에 한국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비행기로 12시간, 차로 7시간을 달려 네바다주에 도착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길이 꽤나 아름답다.


끝없이 펼쳐진 길을 한참을 달리니 해가 지고 도시의 빛이 점차 사라지기 시작했다. 버닝맨이 열리는 Black Rock Desert에 가까이 왔다는 신호였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 가며 침착하게 모래바람이 휘날리는 어둠으로 들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저 멀리 박스 오피스가 보였다. 80년대 느낌이 물씬 나는 네온사인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신분증을 확인하고 티켓과 안내서를 받았다. 버닝맨에서 지켜야 할 수칙과 수천 개의 캠프에서 열리는 다양한 활동에 대한 설명이었다.


다시 얼마간 어둠 속을 들어가자 인디언 복장과 얼룩말 옷을 입은 사람들이 나타나 차를 세웠다. 그들은 차 안을 검사하고 티켓을 확인한 뒤에 ‘웰컴 투 버닝맨’이라 환영의 인사를 건네고 나를 차에서 내리게 했다. 입구에 세워져 있는 징을 치는 세리머니를 위해서였다. 둥! 하고 징을 치자 내가 두발로 딛고 있던 현실 세계가 잠시 동안만 존재하는 비현실 세계로 바뀌었다. 드디어 꿈의 버닝맨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마침내 버닝맨의 입장권을 손에 쥐었다.


BRC에 입장 한 뒤 지도를 보며 수많은 캠프 속에서 우리 캠프를 찾았다. 우릴 초대해주고 여러 가지 것들을 예약받고 마련해 준 H를 만났다.


반가운 얼굴의 나와는 대조적으로 H는 곤란한 얼굴을 하고는 태풍 때문에 우리의 텐트가 창고 속 깊은 곳으로 보관되어 꺼낼 수 없다는 말을 했다. 다른 텐트들은 멀쩡히 서있는데 우리 텐트만 치지 못한다는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재차 확인하니 사실 우리가 쓸 텐트를 어떤 사람이 차지하고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을 내보낼 수는 없으니 오늘 밤은 천막을 쳐둔 어떤 공용 장소에서 대강 눈을 붙이는 게 어떻겠냐고 말을 이어갔다. 이런 게 버닝맨이라면서.


‘응? 이런 게 버닝맨이라고..?’


저 어디서 자나요..?


뿐만 아니라 그가 가리킨 캠프의 샤워시설은 텐트들 사이에 세워진 뚜껑 없는 트럭이었다. 트럭 위에 간이 샤워기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샤워부스도 천막도 아무것도 없이 덜렁 공개된 장소에 서있는 샤워기는 두 손으로 힘껏 펌프질을 해야 물이 졸졸졸 나오는 종류의 것이었다. 게다가 화장실은 캠프에서 자전거를 타고 조금 가면 일렬로 주욱 서 있는 간이 공중 화장실이었는데 물을 내리지 않는, 이용한 사람들의 내용물을 켜켜이 그대로 쌓아두는 놀라운 곳이었다. 깜짝 파티를 위해 의도된 최악의 상황 연출이라고 해도 믿을 만했다. 버닝맨을 즐기기에 완벽한 준비를 했다고 자신만만하게 잔뜩 기대를 품고 왔는데 도착해보니 모든 것이 예상과는 다르게 펼쳐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며칠간 예정된 컨디션 난조를 겪고 있는 나에겐 이 상황이 아찔하다 못해 Burning Man Hell 같았다.


화장실과 샤워시설을 갖춘 캠핑카를 빌리기로 했던 우리 일행은 왜 갑자기 텐트로 계획을 바꿨을까(게다가 비용 차이도 없었다!), 나의 텐트에서 무단으로 침입해 자고 있는 사람은 누구며, 캠프를 주관하고 있는 H는 어째서 어쩔 도리가 없다며 이 상황을 방관하고 있을까. 잠자리는 그렇다 쳐도 샤워시설과 화장실에 대해 나는 왜 제대로 체크하지 않았을까.. 다양한 종류의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다. 나 스스로에 대한 자책부터 다른 사람에 대한 원망까지 가득 차올랐다.


바람이 휘몰아치는 어두컴컴한 밤의 사막에서, 몇 달을 손꼽아 기다리고 스무 시간이 걸려 도착한 이곳에서 길을 잃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누구, 여긴 어디


꿈꿔왔던 나의 버킷리스트, 나의 버닝맨, 나의 유토피아는 경험해보기도 전에 신기루처럼 사라진 것 같았다. 앞으로 내가 감당해야 할 며칠에 눈앞이 깜깜했다. 당장 돌아가고 싶었으나 그것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밤이 된 지금 8시간의 길을 다시 운전해서 갈 순 없었다. 돌아가든 남아서 일정을 소화하든 당장은 억지로 마음을 추슬러야 했다.


미리 빌려놓은 자전거까지 찾을 수가 없었지만 여차저차 여기저기서 구해 짐은 못 풀었으나 일단 간단하게 버닝맨을 둘러보기로 했다. 달리 지금 있을 곳이 없는 상황이므로 나도 마지못해 따라나섰다.




수십 년간 이어져 온 버닝맨은 해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이 모이고 있다(이번엔 8만 명 정도가  모였다). 그들은 대게 어느 캠프에 속해있다. 수천 개의 캠프는 거대한 반원 모양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블랙 락 시티가 존재하는 일주일간 캠프에서 온갖 종류의 다양한 강연들과 행사, 활동이 열린다. 캠프들이 바라보고 있는 공간과 그곳을 넘어 선 광활한 사막엔 크고 작은 예술품과 건축물 등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예술 작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사이를 휘황찬란하고 기발하게 꾸민 아트카(Art Car)들과 자전거를 탄 온갖 코스튬을 한 사람들이 활보한다.


Black Rock City. Camps and Playa


일단 우리 캠프 근처를 둘러보기로 했다. 도시의 빛이 차단된 칠흑 같은 어둠을 온갖 불빛들이 채우고 있었다. 사람들과 캠프들, 아트카 등이 반짝이는 것들을 잔뜩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흡사 놀이동산의 야간 축제 같았다.


BRC의 화려한 밤. 아트카들이 줄지어 서있다.
화려한 조명을 달고 있는 자전거들.


그들 사이에서 버닝맨의 주인공, 맨(Man)을 만났다. 거대한 맨은 블랙 락 시티 중심에 서 있다가 6번째 날 밤에 불태워진다(버닝맨의 하이라이트이다). 해마다 불태워지고 다음 해엔 다른 예술가가 만들기 때문에 Man은 늘 다른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한다. 매 해 다른 맨의 모습을 보는 것도 버닝맨을 기대하는 이유이자 재미 같았다. 올해의 맨은 작년보다 조금 작은 것 같다고, 작년 버닝맨을 경험한 사람이 옆에서 일러주었다.


반짝이는 버닝맨을 뒤로하고 거대한 피라미드의 형상을 하고 있는 캠프를 발견했다. 캠프의 이름은 Alchemist였다. 피라미드는 기하학적인 그래픽 디자인으로 시시각각 색깔과 무늬가 변하고 있었다. 캠프 주변은 레이저를 내뿜는 기둥들이 있었다.


내가 직접 찍은 영상엔 아쉽게도 캠프의 모습이 잘 담겨있지 않다. burning man alchemist를 구글링 해보면 엄청나게 멋진 캠프 사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캠프에 들어서자 큰 수정체 모양의 장신구들이 매달려 있었다. 저 쪽 끝에서 누군가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음악이 낯설었다. 월요일부터 시작된 버닝맨에 수요일 밤에 합류한 버닝맨 초심자가 적응하기엔 어려운 분위기였다.


그땐 낯설었는데 지금 들어보니 신난다. Burner가 되긴 되었나보다.


밖으로 나와 자전거를 타고 조금 더 가보니 대형 비행기인 747이 세워져 있었다.


무심히 지나가는 형형색색의 아트카들과 거대한 747. 나도 질새라 반짝이를 휘둘렀다. 첫날이라 자전거가 서툴다.


멀리서도 존재감을 뽐내고 있는 747은 온전한 모습으로 서있었어도 놀랄만할 텐데 무려 뚝 잘라진 모습으로 형형색색의 빛과 연기, 음악을 내뿜으며 장엄하게 서있었다.



747은 해마다 버닝맨에 오는 명물이었으나 올해가 마지막 참여가 될 거라고 한다. 운이 좋게 버닝맨 747의 마지막을 본 것이다.


747내부. 747엠블럼이 멋있다.


비행기 안으로 들어가자 디제이가 춤을 추며 디제잉을 하고 있었다. 디제이 덕분에 나도 잠시 흥이 났지만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해결될 수 없는 문제들이 떠올랐다.


비행기 날개에 서서. 비행기 날개 위에서 사진 찍을 수 있는 날이 또 있을까?


캠프로 돌아와 보니 여전히 텐트는 비워지지 않았고 내일 나의 텐트를 찾는다 해도 과연 다른 상황들을 잘 극복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어렵사리 빌린 작은 텐트에 몸을 누이고 다가올 날들을 떠올렸다. 트럭 위에서 씻을 나와 충격적인 비주얼과 냄새를 내뿜는 비좁은 화장실 안에서 고통받을 나를 생각했다.


버닝맨에 오기 바로 전 주에 나는 인도네시아의 한 정글에 있었다. '정글의 법칙'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포맷의 예능 프로그램을 찍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이 아예 없어 자연을 이용하는 것과 온갖 것들이 쌓여 있는 화장실 중에 풀 숲이 차라리 나을 지경 같았지만, 무튼 거기서도 잘 생존해서 돌아오지 않았던가. 씻는 것도 뭐 대강 안 씻고 견디면서 지내오지 않았던가. 어려움을 예상하고 간 것과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왔지만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린 것의 마음의 차이가 꽤나 크지만 또 어떻게든 헤쳐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여러 가지로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 했지만 자꾸만 뜨거운 게 목에 걸렸다. 두려움과 피로를 껴안고 눈물을 삼키며 버닝맨에서의 첫날밤을 보냈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BWARE OF NOTHING. 떠오르는 태양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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