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노원구 11평 쪽방 랩소디

by 연쿠

설날 저녁, 엄마집에 벽지처럼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미스터 트롯을 그날도 멍 때리며 바라보다가 문득 노래방을 가볼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가족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던 기억이라면 20년 전 아빠 품에 안겨 같이 ‘얼굴 찌푸리지 말아요~’를 부르던 것이 전부다. 다 큰 어른들이 모여 달리 할 것이 없었기에 그리 내키진 않아도 다들 묵묵히 길을 나섰다.
코인노래방이 아닌 노래방은 정말 오랜만이었다.
언뜻 내 나이보다 더 된듯한 촌스러운 자수가 새겨진 회복숭아색의 눅눅한 소파에는 언제부터 있었는지 모를 브이콘 한 조각이 뒹굴고 있었고 누런 화면의 기계는 버튼을 몇 번이고 눌러도 멀뚱히 있다가 화면이 멈추기를 반복했다. 타임머신이라도 타고 온 듯 그때 그 시절 감성이 그대로인 노래방에 새 가족이 된 새언니도 없이 원년 멤버 그대로의 우리 가족 완전체가 함께 둘러앉아있자니 기분이 정말 묘했다. 어색한 우리의 관계만큼 우중충한 발라드만 조신하게 불러댈 모습들이 뻔했고 그런 건 내가 못 견딜 것 같아 나를 내려놓기로 했다.

막둥이로서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탬버린 춤에 마이크를 공중으로 1m는 던졌다가 현란하게 낚아채가며 90년대 록발라드를 열창했고 아빠, 엄마, 오빠들 모두가 처음 보는 내 모습에 놀라서 환호하는 모습은 재롱 피우기에 힘을 더해줬다. 김건모의 서울의 달은 쫀득한 모창으로 까불거리기 좋아 내 18번 중 하나다. 이번에도 잔뜩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내가 읊은 가사는 이랬다.


‘텅 빈 방 안에 누워 이 생각 저런 생각에 기나긴 담배 연기 또 하루가 지나고 하나 되는 게 없고..’


 흡사 싸이 콘서트 같던 뜨거운 열기는 간데없이 가족 모두 노래방 화면만을 숨죽여 응시하는 가운데 노래를 하고 있자니 가사가 마치 내 이야기처럼 입속에 가득 차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슬쩍 흘겨보니 맞은편 뒤쪽에 앉은 엄마가 눈물인지 눈곱인지 연신 눈을 닦아낸다. 벌써 몇 년 전 적성에 맞지 않던 일을 버티던 끝에 그만두고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요즘이다. 좁은 방에 혼자 갇혀서 의미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지 말라며 매일 닦달하는 엄마의 잔소리를 끝내 견디지 못하고 ‘난 여태 이룬 게 아무것도 없어 엄마.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아직도 모르겠어.’라며 토해내듯 울먹이며 막막함을 고백한 적이 있었다. 내세울 게 없는 만큼 늘 잘 사는 척, 강한 척하는 나였기에 모두 앞에 가사를 빌려 내 마음을 고백하고 있다는 수치스러움이 문득 느껴졌다. 눈물을 훔치는 듯한 엄마를 보고 나니 그냥 그런 기분이 되었다. 도망치듯 2절을 마치자마자 위장용 웃음을 터뜨리며 안경을 조절하는 척 쏟아지는 눈물을 닦아냈다.

몸은 다 커버린지 오래인데 삶을 대하는 나의 기분은 초등학교 6학년때와 별반 다름이 없고, 또 각자의 낮과 밤은 다르다고 믿고 있지만 유부라는 꼬리표와 곧 서른이라는 숫자가 짓누르는 압박감은 무시하기가 어렵다. 우여곡절 끝에 결정한 서울의 11평 쪽방 신혼생활에 만족하며 살고 있지만 다음 단계를 떠올리면 아득하기만 해서 못하는 게 아니라 안 하는 것이라고 위로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고작 노래가사 한 줄 때문에 무너질 만큼 자신감이 메말라 있을 줄은 나도 몰랐다.

여전히 어떻게, 어느 곳으로 어떤 발걸음을 떼야할지 확신이 없다. 성인이 되면 그간 제법 인정받아온 전공을 살려 취직해 입에 풀칠은 하며 살아가겠거니 했던 그 작은 꿈이 여러 번 좌절되고 나니 내가 믿어왔던 모든 것이 다 틀린 기분이고 나조차 그런 내가 부끄럽고 싫어진 것 같다. 그런 와중에 집 한 채 정도의 부를 이루기 전까지는 늘 부족하고 불안한 시간이 될 것이라는 현실이 남은 삶의 의지마저 뺏어갔다. 내 마음도 가치관도 많이 상해버리고 나니 눈치 없이 콧구멍 속으로 파고드는 산소조차 의미 없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내 나이가 29. 평범하게 살아남는다면 80살까지 대략 50년은 더 살아내야 한다. 자아실현을 포기하고 돈만 벌며 연명하기로 결정하기엔 아직 이르다. 어차피 50년 뒤면 내 인생도 어김없이 흙 속에 묻히겠지. 언젠가 썩어 없어질 몸, 천천히 말려 죽이는 썩은 가지 같은 생각은 지금 도려내기로 한다. 살기 위한 경쟁으로 얼룩진 서울의 달빛 아래 언제부터 썩었을지 모를 고목이 되지 않기 위해 남은 시간은 조금 더 당당하게 살기로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