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 내가 할 수 있는 것.
왜 살아야 하는지 진지하게 묻고 싶다고 했다.
진심으로 정말 알고 싶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마흔 이후의 삶이 도무지 그려지지 않았다고,
아마도 마흔이 될 즈음이면 충분히 견딜 만큼 견딘 상황일 테니, 그즈음엔 멈춰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십을 눈앞에 두고 있는 자신에게 진심으로 어리둥절해졌다고.
수많은 검사와 상담과 약물과 치료를 거치면서 이처럼 지난하게도 삶을 이어가고 있는 자신에게 어처구니가 없다가, 다시 바닥으로 내리 꽂히는 느낌이 너무 싫어 억지로 억지로 꾸역꾸역 움직이는 자신이 너무 바보같이 느껴진다고 했다.
나름 정한 마흔이라는 기준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살아야 하는 현실이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혼란이 심연의 바닥에 딱딱하게 굳어 있는 듯했다.
나는 매우 조심스럽게 가늠해 보려 노력했다.
아주 작은 아이가 막연하지만 매우 명확한 마흔이라는 나이 이후의 삶을 전혀 그리지 못한다면 그 아이의 삶은 과연 어떠했을까.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해야 하는 존재가 이 세상에서 가장 불안한 존재일 때 아이가 느끼는 것은 단순한 불편감을 넘어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였을 것이다.
나를 보호해 줄 것이라 믿었던 존재가 오히려 나를 공격하고 세상과 사람들로부터 철저히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면 아이에게 세상은 불안과 의심과 날카로움과 공격성과 포기와 회피와 냉담과 무관심으로 가득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나아가 그런 것들이 가득한 세상이라면,
그래서 그런 것들과 매 순간 마주하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겨우겨우 살아질 수 있다면,
매번 소진을 경험하며 염증으로 가득한 삶 속에서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순간이 기껏해야 쓰라린 고름을 닦아내는 순간일 뿐이라면,
멈추고 싶을 것이다.
희망이라는 단어가 외국어처럼 생소하고 조금이라도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도무지 상상할 수 없다면,
거대한 고통과 온갖 부정적인 미래가 끈끈하게 들러붙어 마음 밭을 굴러다니며 점점 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난다면,
그리하여 결국 그 거대한 블랙홀 속에 잠식당하고 말 것이라는 결론밖에 다른 것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멈추고 싶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으면 안 되는지, 그 어떤 것에도 말을 얹지 못했다.
다만, 그이의 고통에 최대한 함께해 보고자 끙끙댔다.
나에게 허락된 모든 상상력을 동원해 그이의 어린 시절을 그려보려 노력했고
그이가 아버지에게 매질을 당할 때 느꼈을 몸의 고통과 마음의 아픔을 느껴보려 애썼다.
매질을 당할 때마다 말려주긴커녕 그이를 탓하며 모든 원인과 이유를 그이에게 쏟아부었던 어머니에게서 그이가 느꼈을 슬픔을 감각해 보려 노력했다.
그나마 아주 작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친구와 그의 부모에게 그이를 거짓말쟁이이자 문제아로 몰아 관계를 고립시켰을 때 그이가 느꼈을 분노와 고통을 짐작해 보려 했다.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이 없는 그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이었을지 고민해 보려 했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나는 아이러니하게도,
헤아릴 수 없는 삶의 고통과 상처 속에서도 어떻게 해서든지 나아가고자 했던 그이의 몸부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절하게 빛을 내는 그이의 생명력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아주 조심스럽게 내 마음의 거울을 살며시 그이의 앞에 놓았다.
그 처절한 빛이 그이에게 다시 반사될 수 있도록 아주 조심스럽게.
그렇게라도 그이의 삶에서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서 결국 그이의 삶에 빛이 들어오는 순간을 만들 수 있는 건 바로 자신 안에 있는 처절하지만 선명한 그 빛이라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게 하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고작 그것이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