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에는 늘 같은 풍경이 반복된다.
현관문 앞에 놓인 택배 상자, 냉장고를 열고 닫는 소리, 과일을 깎는 칼끝의 일정한 리듬.
그리고 그 모든 소리 위로 겹쳐지는 부모님의 목소리.
오랜만에 집에 갔더니, 부모님은 나를 보자마자 말을 시작했다.
“요즘은 말이야.”
그 말은 마치 오래전부터 준비된 문장처럼 매끄럽게 이어졌다.
자신의 건강 이야기, 동네 사람 이야기, 뉴스에서 본 정치 이야기, 누구네 딸이 취직했다는 이야기, 오빠네 부부가 어떻게 지내는지, 손녀들이 요즘 뭘 잘 먹는지, 올해 김치 맛이 어떤지, 물가는 왜 이렇게 올랐는지.
식탁 위 반찬이 바뀔 때마다 화제도 바뀌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설거지를 하면서도, 잠깐 귤을 까는 동안에도 이야기는 멈추지 않았다.
나는 대부분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그래?”
“아이고, 그랬구나.”
“헐, 힘들었겠다.”
짧은 말들이 내 몫이었다.
처음에는 조금 버겁기도 했다. 말의 양이 너무 많았다.
부모님은 마치 지난 몇 달간 저장해 둔 파일을 한꺼번에 전송하듯, 기억과 감정을 풀어냈다.
나는 그 데이터를 받아 적는 수신기 같았다.
하루가 끝날 즈음, 머릿속은 부모님의 에피소드로 빼곡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빼곡함이 싫지 않았다.
잠자리에 누워 천장을 보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 참.. 우리는 모두 들어줄 사람이 필요하구나.
부모님의 말은 그리 대단한 내용이 아니었다.
세상을 뒤흔드는 사건도,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는 고백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하루하루를 살아낸 사람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시장에서 만난 이웃의 표정, 병원에서 느낀 서운함, 손녀의 한마디에 녹아내린 마음, 배우자에게 미처 하지 못한 말.
사소하지만, 그래서 더 소중한 조각들.
그 조각들은 혼자 간직하기엔 조금 무거웠던 것 같다.
누군가에게 말로 꺼내야 비로소 정리되는 감정들.
누군가가 “응” 하고 받아줘야 제자리를 찾는 생각들.
우리는 흔히 말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설득력 있는 문장, 재치 있는 농담, 논리적인 주장.
하지만 그날 나는 깨달았다.
누군가의 곁에 오래 남는 사람은,
어쩌면 말을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잘 들어주는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점점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친구와 다툰 일, 미래에 대한 걱정.
그때 부모님은 지금의 나처럼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을 것이다.
“그래?” “속상했겠네.” 그렇게 짧은 문장으로 나를 받아주었을 것이다.
이제는 자리가 바뀌었다.
부모님의 하루가 나를 통해 흘러간다.
어쩌면 나이가 든다는 것은,
말할 기회가 점점 줄어드는 일인지도 모른다.
주변은 바빠지고, 세상은 빠르게 변하고,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사람은 드물어진다.
그럴 때 명절처럼 잠시 시간이 멈춘 틈에서,
부모님은 오래 묵은 이야기를 꺼낸다.
마치 그 말들이 “나는 아직 여기 있다”라고 증명하는 방식처럼.
나는 그 증명을 조용히 받아 적었다.
듣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상대의 말을 끊지 않는 인내, 판단을 잠시 미루는 여유, 자기 생각을 앞세우지 않는 태도.
그러나 그 수고 끝에 남는 것은 묘한 따뜻함이다.
누군가의 시간이 나를 거쳐 갔다는 감각.
누군가의 하루가 나를 통해 조금 가벼워졌을지도 모른다는 작은 안도.
명절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부모님의 목소리가 여전히 귓가에 맴돌았다.
그 많은 이야기 중 무엇이 가장 중요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분명한 것은, 부모님은 그 이야기를 할 수 있어서 조금은 홀가분해 보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삶을 살아내느라 바쁘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에는 늘 비어 있는 의자가 하나쯤 있다.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줄 사람.
중간에 결론을 내리지 않고,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고, 그냥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여 줄 사람.
그날 나는 그 의자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살아간다는 건,
어쩌면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나눠 들으며 버티는 일인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결국 우리는 말하는 사람인 동시에,
누군가의 들어줄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