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쓰기

단어와 단상_매(일)뭐(라도)쓰(기) 프로젝트_7월_30일차

by 쓱쓱

나에게는 얇은 천으로 만들어진 베이지색 긴치마가 하나 있다.


큰 포대 자루에 고물줄을 넣어 만든 듯 투박하지만, 휘뚜루마뚜루 어디든 무난하게 어울리는 심플한 디자인이다.

대학 신입생 때 학교 밑 옷가게에서 구매했으니 거의 24년이 된 치마다.

나는 이 치마를 학교 도서관에서 밤을 셀 때도 항상 입었고 졸업 후 회사에서 만난 남편과 데이트를 할 때도 자주 입었다.

넉넉한 허리 고물줄 덕에 결혼 후 아이를 낳아 키울 때도 금방 입고 벗기 편해 자주 입었고 중년이 된 지금도 한 여름엔 편하게 입고 다닌다.


꽤 많은 세월이 흘렀지만 너무 낡아 보이지도 않고 무엇보다 유행을 타지 않는다.

남편은 가끔 너무 오래된 옷은 버리고 새로 사 입으라고 하지만 나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다.

나는 오래 쓴 물건을 마치 오랜 친구를 곁에 두는 것과 같이 느낀다.

왜냐하면 시간의 압력을 함께 견디며 쌓아온 흔적과 추억이 담긴 물건은 단순한 물건을 넘어 소중한 순간들을 떠올리게 해 주는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24년 된 치마를 입고 나가면 나는 길거리에서 떡볶이를 집어먹는 대학생이 되었다가 사랑에 빠진 연인이 되기도 하고 무거운 장바구니를 손에 든 아기 엄마가 되기도 한다.

베이지색 치마를 입을 때마다 나는 오랜 친구와 옛이야기를 하듯 편안함과 따뜻함을 느낀다.


이렇게 보니 내가 물건을 오래 쓰게 되는 이유는 관계성 때문인 것 같다.

그러니 오래 쓰기란 결국 내가 맺는 관계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함께 시간을 통과한 관계에서 만이 느낄 수 있는 연결감과 그 의미들이 나에게는 참 소중한 가치라는 것을 새삼 새롭게 느낀다.


올해도 여름옷을 정리하며 베이지색 치마를 꺼내 놓았다.

천이 좀 얇아진 것 같긴 하지만 오히려 부드럽게 느껴진다.

이번 여름, 또 다른 시간의 무늬가 멋지게 새겨질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벌써 마음이 따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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