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 앞에선 혼자가 된다
연주날이 가까워지면 연습을 제외한 다른 모든 일에 마음 쏟기 어려워진다. 24시간 중 연습시간은 기껏해야 3시간뿐이고 사실 더 적게 하는 날도 많다. 자는 시간 8시간을 빼도 13시간이나 있는데 이때 무얼 하느냐가 연습시간 3시간에 큰 영향을 미치는 걸 여러 번 경험한 이후로는 하지 않는 것들이 늘었다.
13시간 중 대부분은 다른 이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한 일을 한다. 학생들을 가르치고 강의를 준비하고 영상을 만든다. 나머지 시간에는 운동을 하고 산책을 하고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예능을 보는 일처럼 마음을 많이 쏟지 않아도 되는 일만 한다. 이 시간에 친구들과 만나서 한참 대화 나눠도 거뜬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여러 날 나를 관찰해 본 결과 나는 이와 정반대의 사람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는 매년 여름 음악 캠프에 참가했다. 그곳에선 나와 비슷한 일상을 보내는 이들이 모여 2-3주 동안 같이 연습하고 연주하고 레슨도 받는다. 내가 음악 캠프에 매년 참가한 이유는 하나였다. 미국 학교의 여름 방학은 너무 길고 아무 데도 가지 않으면 그 시간을 허비할 것이 분명했다. 나는 그때도 지금도 '허비'라는 것을 몹시 불안해한다.
그곳에 참가한 모든 이들은 같은 숙소에 머물며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아침, 점심, 저녁을 먹는다. 나에게 큰 테이블에서 많은 이들과 대화하며 밥을 같이 먹는 일은 이후에 할 연습과 밤에 있을 연주에 쏟을 힘을 빌려 써야 하는 일이었다. 큰 목소리로 많은 이들과 크게 웃으며 대화를 나눈 후에도 기가 막힌 집중력으로 연습도 잘하고 연주도 끝내주게 하는 이들은 어떤 캠프에 가도 매년 있었고 나는 그들이 몹시 부러웠다.
내년엔 정말 오지 말아야겠다고 그곳에서 밥 먹을 때마다 다짐했지만 나는 또 다음 해에 오디션 영상을 보냈고 그곳에서 밥을 먹었다. 매년 여름 캠프가 끝날 때마다 나의, 그리고 내 음악의 엄청난 성장을 느꼈고, 그 성장의 기쁨은 밥 먹을 때 힘든 것쯤은 이길 수 있을 만큼 컸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성장은 전부 다른 이들로부터 얻었다. 그들의 연주를 보며 배우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들이 연습 시간을 어떻게 확보하고, 아침에 일어나서는 무얼 하고, 어떤 말을 많이 하고, 어떻게 힘을 분배하는지를 나의 모습과 비교하며 많이 생각하고 배웠다.
가장 잘하고 싶은 일이 같은 사람들끼리 있으면 외롭지 않다. 그곳에선 그 일에 마음을 쏟는 일이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럽다. 내가 가장 마음을 쏟는 일이 사실은 쓸데없이 힘만 들고 돈도 안되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일이라 느낄 틈이 없을 정도로 늘 왁자지껄하다. 가을, 겨울, 봄에 느꼈던 자괴감과 열등감을 그곳에 있는 몇 주 동안 완전히 잊어버린다.
무언가를 강렬히 원하면서도 원하지 않기도 한다. 함께의 기억을 의지하며 나는 다시 혼자의 평온함에 오래 머물 것이다. 캐럴라인 냅의『명랑한 은둔자』에는 이런 말이 나온다.
고독은 차분하고 고요하지만, 고립은 무섭다. 고독은 우리가 만족스럽게 쬐는 것이지만, 고립은 우리가 하릴없이 빠져 있는 것이다.
평생 고독과 고립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것 같다. 지극히 혼자 해야 하는 일을 잘하기 위해 지루한 일상을 보내지만 진짜 성장하기 위해선 함께여야 한다. 차분하고 고요함을 위한 고독이 하릴없이 고립에 빠지지 않도록 명랑함을 잃지 않는 연습을 하며 지낸다. 연주는 결국 소통이 아니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