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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피아노 Jul 30. 2023

나의 유행가

피아니스트의 플레이리스트

"너는 왜 이런 유행가를 듣니?"


누군가의 입에서 '유행가'라는 단어를 들은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 송대관이 신나게 외치는 '유행가 유행가 신나는 노래'에서만 들어봤던 이 단어를 실제로 쓰는 사람도 있구나. 


중학생 시절 내게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던 아이리버 MP3는 10곡만 넣어도 용량이 꽉 찼기 때문에 곡 선정에 늘 신중해야 했다. 당시 나의 유행가는 조성모, 에픽하이, 신화, Westlife 등 나름 다채로웠는데 학교가 멀어 유난히 길었던 등, 하굣길에 그 노래들은 나의 위로이자 친구였다. 


그때 소중히 들었던 곡을 지금은 거의 듣지 않는다. 그 시대의 정서가 물씬했을 예민한 사춘기 소녀의 마음에는 와닿았지만 지금 듣기에는 나의 정서와 가치관이 많이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이 특성 때문에 '유행가, 상업음악, 대중음악'보다 '고전음악, 서양음악, 클래식'이 더 우월하다고 말을 하곤 한다. 유행가는 한철이고 클래식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또, 유행가는 대중을 타깃으로 한 상업적인 음악이므로 수준이 떨어지고 고전음악은 음악을 좀 안다는 교양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고급음악이라는 거다. 


어쩌다 내 플레이리스트를 보시고 왜 유행가를 듣냐 물으셨던 피아노 선생님의 말을 들었을 때 '그냥 좋아서요'라고 답하고 싶었지만 형태만 의문문이지 대답을 기대하고 하신 말씀이 아니란 걸 알았기에 멋쩍게 웃기만 했다.


우리가 클래식이라고 부르는 음악들도 한때는 유럽의 대중음악이었다. 작곡가들은 의뢰를 받고 곡을 만들어 팔며 생계를 유지했고, 교회가 직장이었던 바흐는 매주 예배를 위해 새로운 곡을 작곡하는 게 그의 업무였다. 물론, 오늘날의 대중과 그 당시에 대중의 의미가 같지 않고, 과거로 거슬러 갈수록 음악을 접할 수 있었던 이들은 상류층들 뿐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곡들이 특정 시대의 정서와 유행을 따른 유행가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시대에 살지 않았고, 유럽에서 아주 먼 곳에서 태어난 우리가 과거 서유럽에서 유행하던 음악이 낯설게 느껴지는 건 너무 당연하다. 


음악 장르에 '고급'과 '저급'이 어디 있겠는가. 어떤 기준으로, 감히 누가 정하겠는가. 그 당시 유럽에서 수많은 작곡가들이 수많은 곡을 작곡했는데 극소수의 곡만 오늘날까지 살아남았고, 연주되고,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그 소수의 작곡가와 곡의 위대함을 증명하는 것이지 '클래식'이라는 장르가 오늘날의 '대중음악'보다 우위에 있다는 건 아니다.



MP3에 클래식 곡만 있었던 시기도 있었다. 보통 클래식 곡은 길이가 길기 때문에 한 악장, 또는 짧은 곡만 들어갔다. 연습하는 곡을 넣기도 했지만 그건 그 곡이 좋아서 듣기보다는 공부 목적으로 들었다. 정말 좋아했던 곡은 피아노 곡보다는 바이올린, 첼로, 현악 4 중주곡이었는데, 당시 나의 정서가 그 곡이 갖고 있는 무언가에 반응했기 때문에 좋아하게 됐고, 반복해 들었고, 그 시절 나만의 유행가가 되었다.


신성시되기도 하고, 지겹다고, 혹은 어렵다고 여겨지는 클래식 음악. 이 음악을 듣는다고, 연주한다고, 잘 안다고 결코 고급스러운 사람이 되지 않는다. 다만, 세월을 이기고 살아남았다는 건 인간의 본질적인 부분을 건드리는 힘을 가졌다는 뜻 아닐까. 아무리 시대와 사회가 변해도 인간이 유한하다는 사실과 사랑, 질투, 슬픔, 상실로 천국과 지옥을 왔다 갔다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그리고 앞으로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 우리가 치열하게 고민하는 것들을 몇 백 년 전 먼 땅에 사는 그도 똑같이 고민했고, 그걸 그의 음악에서 느끼기 때문에 마음을 건드리는 것 아닐까. 


"네가 느끼는 그 감정, 나도 느껴봤어. 네가 하고 있는 그 고민, 나도 치열하게 하고 있어." 

이렇게 느껴야만 우리는 위로를 받는다. 몇 백 년 동안 이런 위로를 받은 사람들을 통해 전해지고 살아남은 음악을 연주하고 가르치는 내가 할 일은 내 우월성 또는 클래식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것이 결코 아닐 것이다. 그저 볼 것도, 할 것도 너무 많은 이 세상에 이런 위로의 수단도 있다고 소개해주는 전달자가 되는 일 아닐까. 오늘도 작게나마 그 일을 해낸다면 뿌듯한 마음으로 잠을 청할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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