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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연섭 Mar 10. 2019

공간과 시간

나는 눈을 감고 우주 너머를 봐야겠다

과학이 철학에서 태어났지만 혹은 그 반대일지라도 아직도 탯줄이 붙여있는 부위가 시간과 공간이다. 이 탯줄을 잘라야 하는데 철학도 과학도 정확한 답을 주지 못하고 상상만이 춤추고 있다.


지금이라도 생각하여 보자. 공간은 사방이 자유롭다. 지금 내 위치에서 어디든지 갈 수 있다. 동서남북으로 나누어 원하는 곳으로 차를 타고 혹은 걸어서 갈 수 있다. 반면에 시간은 지금 외에는 어디로도 갈 수가 없다. 시간을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지만 과거로나 미래로 갈 수가 없으며 나의 의지대로 빨리 갈 수도 없다.


따라서 공간과 시간의 특성은 상당한 차이가 있고 서로 독립적이다. 당연히 과학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독립적인 변수로 취급한다. 특히 뉴턴 역학이 그렇다.


반면에 현대 철학 이전 철학자들은 공간과 시간을 굳이 구별하지 않았다. 공간과 시간의 차이를 알았겠지만 더 이상 개념을 세분하여도 이득이 없었기 때문이라 나는 추정한다. 그래서 칸트는 시간과 공간의 인지능력을 구분하지 않고 사람이 태어나면서 선천적으로 지닌 본유  능력으로 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그런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나오면서 시공간에 대한 인식이 역전되기 시작한다. 과학에서는 공간과 시간을 하나로 뭉쳐 시공간으로 보기 시작한다. 독립된 두 개의 변수가 아니라 서로 침투가 가능한 두 개의 변수로 본다. 예를 들어 한 관찰자에게 거의 동시에 발생한 두 사건도, 또 다른 관찰자에게는 시간의 순서가 역전되어 보일 수도 있다. 역전이 안 되는 사건은 명백한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는 사건으로 한정된다.


이에 자극받은 베르그송은 기존 철학적 관점과는 반대로 시간과 공간을 오히려 구분하기 시작한다. 인간은 공간을 지성으로 인식하고 시간을 직관으로 인식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에는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만 생성되는 시간 특성을 간과한 과거 존재론은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무한한 공간에 비해 한 점의 현재 시간 속에 구축된 이전 철학은 뭐가 잘못되어 있을 수도 있다. 이는 예리한 분석일 수 있다.


이런 지점까지 이야기가 전개되면 과학도 철학도 시공간에 대해 답을 하기 어려워진다. 조금만 더 상상을 하여 보자. 우주는 빅뱅에 의해 탄생하였고 지금도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다. 팽창된 우주 안에는 공간과 시간이 있다. 그럼 팽창하는 우주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래서 상상을 해야 한다. 우주의 시공간과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다.


팽창하는 우주는 탄광에서 깊어지는 갱도와 유사하지 않을까? 갱도의 끝에서 끊임없이 시간과 공간이 생성되고 있다. 그러면 공간은 시간과 다르게 무한정 펼쳐져 있다는 우리의 재래식 지식은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시간은 정말 실재하는 변수일까? 공간에서 일어나는 변화  추이를 시간이라는 어휘로 부르는 가상 변수가 아닐까? 매일 아침에 뜨는 같은 해만 보면 시간을 흘렸다고 보기 어렵다. 다만 바라보는 내 신체가 변화되기 때문에 시간이 흐른 듯이 보인다. 늙는 것도 멈추고 정지되어 있다면 굳이 시간을 도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 흘려가는 시간에 탄 나는 멀미를 느낀다. 나는 눈을 감고 우주 너머를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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