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모처럼 하늘빛이 고운 여름날 용산에 있는 아모레퍼시픽 건물에 갔다. 아모레에 볼일이 있을 리는 만무하고, 그 건물의 구층인가 부터는 삼일회계법인(PWC) 가 있다. 회계사만 몇백명이 근무한다는 우리나라 최대 회계법인이자, 세계 4대 회계법인중 하나라는 PWC의 한국본사가 아모레 퍼시픽 건물에 있다. 지금 다니는 회사의 투자범위가 확대되고 관리가 복잡해 지면서 회계 및 투자에 대한 컨설팅 관련을 가끔 이곳에 들리게 된다. 회사 대표님이랑 같이 엘리베이터로 올라갈때 마다. 이런 곳에 사무실을 정하는 이유는 분명히 자기들 회계컨설팅 청구서가 왜 엄청나게 비싸야만 하는지를 미리 이야기해 주기 위해서 라고 킥킥거리며 이야기 하곤 한다.
회의실로만 전체 건물 빙 굴러가면서 이루어진 11층에는 VIP 고객과의 회의를 위한 방들은 미국에게서 넘겨 받은 용산공원 일대와 남산이 거칠 것이 한 눈에 들어오는 북면에 자리잡힌 있다. 그 중에서도 모서리 방은 국립중앙박물관 건물과 남산 타워가 한꺼번에 보인다. 박물관이 주위 엄청난 녹지을 함께 하고 있는 사실을 새롭게 느끼게 한다. 오랫동안 한국 주둔 미군의 사령부와 국군사령부 등이 위치했던 관계로 서울의 가장 요지이고 한강변을 옆으로 끼고 있으면서도 회색빛 아파트 숲으로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이 지역은 높은 건물의 숫자가 확연히 적어서 초록색이 유달리 많이 보이는 용산의 푸른 전경 한가운데로 중앙박물관이 보인다. 컴퓨터 배경 화면으로 사용하면 딱 좋을 것 같은 멋진 전망이 회의실 양방향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밑에서 올려다 보면 딱 벌어진 어깨로 나를 주눅들게 만드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오늘은 산꼭대기에서 내려다 보이는 어느 마을의 교회처럼 한 손으로 잡을 수 있을 듯 아담하고 친근한 모습이다.
박물관은 이야기의 광산 같은 곳이다. 파고 또 파도 끊임없이 이야기들이 넘친다. 특히 거의 대부분의 유물이 누군가의 무덤에서 가져온 고대관을 지날때면 유물의 영혼들이 내 주위를 떠다니며 자기 사연 좀 들어보라고 귓구멍에 입김을 불어넣는다. 죽은 이를 애도하거나 헤어짐을 슬퍼하는 일이 인간에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시신을 매장하는 관습이 떠난자를 기억하려는 것 보다는 썩은 고기를 찾는 짐승을 접근을 막으려는 데서 시작되었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매장은 다른 짐승들의 매장과 다른면이 분명히 있다. 우선 인간의 무덤은 매장된 장소를 장식을 한다. 떠난자를 기억하고 죽은 후의 세상에서도 잘 지내라고 매장된 장소를 특별한 물건과 무덤 자체를 장식하는 습성(혹은 문화) 인간에서만 나타난다. 살아생전에 그가 사용하던 물건이나, 죽은 뒤의 세상에서 혹시 필요할 법한 물건들을 그의 시신과 함께 매장을 하고 그가 묻힌 곳을 기억하기 위한 장식은 유인원들에게서도, 심지어는 네안데르탈인에게서 나타나지 않으며 오직 호모사피엔스에게서만 나타난다. 고대관의 상당부분은 그러한 호모사피엔스의 무덤에서 가져왔다. 실제로 우리가 기록으로 남겨지지 아니한 오래전 선사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이나 문화를 추정해 볼 수 있는 것은 대부분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에 의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박물관은 거대한 무덤일 수도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대판 피라미드이자, 병마용이다.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은 입장부터 좀 남다른데가 있다. 지하철역인 이촌역에서 박물관까지는 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다.
아마 박물관의 설계자들은 처음 이곳에 박물관을 지을 때 부터 이촌역에서 박물관까지 어떻게 관람객들이 지루해 하지 않고 입장할 수 있게 만들까를 고민한 듯 하다. 역에서 박물관 입구까지 긴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긴 전광판에 작은 전구들의 불빛들이 국보문화재들의 실루엣을 보여준다. 고조선의 청동검부터 조선의 백자까지 2천년을 훌쩍 넘는 세월들을 길게 늘어선 전광판이 훑고 지나간다. 긴 복도 시작부터 끝까지 흘러나오는 우리가락을 들으며 이땅에서 살아갔던 솜씨 좋은 명공들이 남긴 보물의 잔상을 보면서 장구한 세월 속에 ‘나는 어디에서 비롯되었고 지금 내 위치는 어딜까’ 하는 상념에 잠겼다가 정신이 깰때 쯤에는 긴 역사의 터널은 끝이나고 빛이 쏟아져 들어오는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이 보인다.
“오늘은 어제가 만든 것이지만 우리가 어제를 이해하는 방식은 오늘에 맞춰 바뀌어야 한다.” TS 엘리엇
“주먹도끼를 설명할 때 어떻게 시작하면 좋을까요?”
늘 웃는 얼굴의 박물관 해설 선생님이 ‘구석기 최고의 히트 상품 -> 맥가이버 칼 -> 아이폰’ 이라고 적힌 PPT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여러분이 어디론가 여행을 떠날 때 꼭 챙겨할 물건은 어떤게 있을까요?”
“돈, 핸드폰, 썬크림, 여권, 비행기표…,등등요”
“구석기인들은 아마 주먹도끼 하나만 가지고 여행을 떠나지 않았을까요?”
“던지거나 꼭쥐고 휘두를 수 있으니 호신용 무기용으로 사용했을 것이고, 한쪽은 뾰족하니 무엇인가를 찌르거나 뚫거나 하기에 적당하고, 다른 한쪽은 뭉툭하니 곡식등 먹을거리를 빻거나 짓이기는 데 적합합니다. 그리고 표면이나 가장자리에는 날카로운 부분을 그대로 둔 것은 먹거리 등을 자를 때 사용하기 위함인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주먹도끼를 발견한 것은 1978년 연천 전곡리에서 한 미군 병사가 여자친구와 데이트 중에 찾은 것이었습니다. 그 미군병사가 고고학 전공자였는데 여자친구보다 돌에 더 관심이 갔었나 봅니다.
그때까지 주먹도끼는 주로 아프리카나 중동지역에서만 발견이 되었고, 동아시아지역에서는 주먹도끼에 비해 단순한 형태인 찍개만 발견이 되었습니다.
서양에서는 이런 발견을 근거로 구대륙 석기 문명의 발전에 대해서 동아시아는 중동/아프리카/유럽 지역보다 뒤떨어졌다는 모비우스의 학설이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나마 조금 수그러들기는 했지만 한동안 학계에는 서양문명에 비해서 동양의 문명을 한참 아래로 보거나 제대로 진화가 되지 않은 문명이라고 생각하고 그것을 증명하려는 노력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연천 전곡리에서의 주먹도끼 발견을 계기로 모비우스의 학설이 뒤집어지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물론 이 발견을 처음으로 주먹도끼는 그 이후에 한반도의 여러지역 이외에도 동아시아의 여러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설명을 듣다가.. 어떤 물건이 처음 만들어지고 다시 변해 나가는 모습들이 생각이 났다. 모든 사람은 흉내내기의 귀재들이다. 아기들은 엄마의 얼굴표정을 보고 따라하고 말소리를 흉내내면서 자신만의 표정짓기와 말하기를 완성해 간다. 내가 알고 있는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는 가장 빠른 길은 현지인의 표정을 보면서 직접 대화를 하는 것이다.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열심히 이해하려고 애써고 한마디라도 건너보려고 하다보면 어느샌가 상대방을 따라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예전에 다녔던 텐트제조회사는 다른 여러나라의 유명 브랜드의 제품을 생산해주던 일종의 OEM 방식 생산업체였는데 바이어회사의 디자이너들은 거의 매년같이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거나 기존 제품을 개선하려고 했다. 매년 시장에 쏟아져 나오는 타 브랜드의 신제품들의 장점을 분석하고, 자신들 제품에 대한 사용자들의 개선요구사항을 검토하고, 시장의 트랜드, 새로나온 소재와 재료들을 자신들의 개발품에 접목하려고 한다. 코로나 전에는 매년 한번씩 열렸던 독일의 아웃도어제품 전시회에는 천정이 엄청 높은 홀 하나에 각 유명 브랜드들의 텐트들을 가득 설치를 하는데, 무언가 새로운 것이 나오면 모두들 쳐다보고 그 다음해에는 그 제품을 모방하거나 그 제품보다 낳은 방안의 제안을 가진 제품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한다. 디자이너들은 자신들이 일년간 노력한 결과와 다른 브랜드 제품의 결과물을 비교하면서 시장의 냉정한 평가를 받는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면서 결과적으로 모든 제품이 비슷해져 간다. 그러다가 한번씩 그동안 없었던 전혀 새로운 방법이 제시되고 또 그 새로운 방법을 모방하거나 더 낳은 방법을 제시하려는 노력이 다시 벌어진다.
길가에 흔하게 굴러다닐 것만 같은 저 주먹도끼는 분명 누군가가 우연히 자연의 돌을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내었고, 처음에는 자연상태의 돌을 그대로 사용을 하다가 나중에는 여기저기 뜯어고쳐서 사용하거나 직접 만들거나 했을 것이다. 이를 본 또 다른 누군가가 그 돌의 생김새와 사용법을 눈여겨 보고서는 흉내내어 만들거나, 새로운 개선사항을 접목을 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 시작이 아프리카든, 아시아든, 유럽이든 간에 긴 세월을 두고 흉내내기가 진행이 되어서 나중에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닿는 그 어느지역이든 ‘주먹도끼’ 라는 결과물은 비슷해 진다. 물론 시간은 상당히 걸렸을 테지만 말이다.
최초의 인류 문명은 오리엔트의 초승달 지역에서 도시가 생겨나면서 시작되었다고 서양인들은 이야기한다. (수메르 문명, 현재 이라크와 터키 영역). 이 문명이 유럽의 남부와 인도북부 그리고 아프리카 북부로 전해진 것으로 생각한다. 4대문명의 하나인 중국 황하 문명의 시작 역시 그들의 최초의 문명의 불씨가 어떤 계기로 전해진 것으로 서양인들은 생각한다. 물론 중국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자신들은 독자적인 문명이고 실제로 시기도 오리엔트 문명보다 그들이 더 빠른 시기부터 였다고 생각한다. 증거자료로 제시를 할수 있다고 한다. (중국이 가진 문제는 중국의 주장을 그들을 제외한 전세계가 신뢰하지 않는다는 데 있지만). 하지만 중국의 청동기 문명은 특이한 데가 있어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청동기 문명들 보다는 그 규모나 형태가 다른 지역의 것들과 확연히 구분이 되는 남다른 데가 분명이 있다. 심지어 중국안에서도 사천지방의 마왕퇴 무덤에서 출토된 괴이하게 생긴 거대한 크기의 청동가면은 사천지역의 청동기 문명은 하남(Hunan) 지역의 은허 청동기 유적과 또 다른 청동기 문명이 존재했음을 이야기 한다.
자기문명에 자부심이 강한 중국은 청동기문명에 관한 중국문명의 유구함과 독자성을 항상 강조한다.
“자 이제 여러분은 석기시대를 거쳐서 청동기의 시대로 넘어왔습니다.” PPT에는 예전에 박물관 소식지에 본적이 있는 사진이 떠오른다.
“청동기실에서 여러분이 주목해야할 유물은 농경문 청동기입니다.”
“이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잘 모르게 생긴 유물은 우리에게 그 시대에 대한 엄청나게 많은 이야기를 해 줍니다.
이 유물은 발견부터 좀 범상치 않았습니다.” 앞면과 뒷면 사진을 포인트로 가르치며 박물관 선생님은 말을 이어간다.
“이 물건은 대전의 한고물상에서 발견이 되었습니다. 고철 장수가 수집한 물건속에서 이 물건이 범상치 않음을 알게된 대전의 고물상 주인이 서울의 골동품 상인에서 연락해서 이 유물을 보여줌으로써 이 유물의 존재와 가치가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1970년도 당시 그 골동품상 주인으로부터 국립박물관이 이 물건을 사들일 때 치룬 가격은 3만원이었다고 합니다. 쌀 한말(80kg) 가격이 6천4백원 쯤이었다고 하니까. 30배 정도 하면 지금 돈의 가치로 계산이 될 것 같습니다. 900만원 정도를 준 셈이지요. ”
“어디에 쓰였던 물건일까요?” 생김새에서 어떤 용도인지가 별로 떠오르지 않아서 다들 머뭇거리자, 해설선생님이 다시 설명을 이어 갑니다.
“청동기에 사용되는 구리와 주석은 돌이나 철에 비해 흔하게 구할수 있는 광물은 아니었습니다. 주로 무기나 제례의식에 사용되는 제기, 거울, 술잔, 거대한 솥 등 특정한 분야의 도구로만 발견이 됩니다. 이 농경문 청동기도 이런 제례의식이나 행사에 사용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 청동기의 머리부분에는 여러개의 홈이 파져 있어서 끈 같은 것으로 연결을 해서 걸수 있게 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제일 모서리쪽 홈이 가장 많이 닳아 있는 것으로 추정해 볼때 주로 이 홈으로 끈을 묶어서 사용한 것 같습니다. 아마 줄을 연결해 목이나 어딘가에 걸어서 제례의식을 행하거나 사용하지 않을 때에 어딘가에 걸어두었던 것 같습니다.
농경문 청동기가 특히 주목받는 것은 그 표면에 새겨진 그림 때문입니다. 마을 경계를 나타내는 솟대, 농기구를 들고 농사를 짓는 벌거벗은 사람들, 밭을 나타내는 그림, 곡식을 저장하던 토기.. 등이 나타나서 이 청동기는 풍년을 기원하는 제례의식의 도구로 사용되다가, 이것을 사용하던 의식의 주관자 (아마 지배자나 신관)가 죽은 뒤에 같이 매장이 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한반도에서 농경이 시작된 것은 신석기 시대인 기원전 30세기경..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이라고 하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쯤 전으로 예측하고 있습니다. 농경문화가 시작되면서 인류의 정착생활이 시작되었고 소유와 계급이 출현하게 되었습니다. 국가의 핵심적인 경제활동이었던 농사는 조선시대까지 국왕이 농사를 직접 장려하기 위한 친경제를 직접 행하는 것이나 궁궐안에 내농포를 두어서 농사를 짓는 등. 선농의식을 가지고 우대해 왔습니다. 요즘 대통령들은 주로 공장이나 연구실을 방문해서 경제활동에 대한 정치권의 관심도를 나타냅니다만, 예전 박정희 대통령 시절만 해도 자주 논에서 농사꾼들과 같이 일하는 모습으로 지배계급의 경제활동에 관심의 정도를 나타내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당신이 농사꾼 출신이기도 했구요. 박정희 대통령이 소매 걷어부치고 농사를 짓던 모습이나 정주영 현대회장이 목장에서 소를 키우고 간척지를 농경지로 바꾸는 일을 했던 것도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농경문화속에서 살아왔는가를 이야기해 주는 일화입니다. 이 장신구는 이 같은 한반도 농경문화의 장구한 역사와 경제활동에 대한 지배자의 제례적. 혹은 주술적 역할을 상징합니다.”
“머리에 길게 장신구를 단 사람이 자신의 남근을 자랑하는 듯이 벌거벗은 몸으로 따비(쟁기)질을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석을 할까요?” 농경문 청동기 표면을 가리키며 선생님이 말한다.
“따비질을 하는 행위를 여성 혹은 여신의 몸으로 상징되는 대지에 씨를 뿌리는 행위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농경과 청동기사회가 시작되면서 사람들이 한곳에 정착을 하게되고 전통적 의미의 가족과 소유가 생겨났습니다. 남자들이 사냥을 위해서 떠돌아 다니던 이 이전의 사회는 여성이 공동체를 지탱하는 모권사회이자 공산사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농경사회가 시작되면서 육체노동이 강조되고 남성들이 씨족이나 부족을 이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서 생산의 주체자를 상징하는 것으로 남근숭배사상 역시 시작됩니다. 이런 나경에 대한 풍습은 조선시대 유희춘의 미암집에까지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굉장히 오랜 시간을 존속해온 것으로 여겨집니다.
선사시대에는 남겨진 유물은 그 숫자가 한정되어 있어서 어떤 의미있는 유물이 하나 발견되면 다양한 방식으로 그 시대의 상황을 해석하고 그 결과물을 현재의 사실들과 어떻게 연관시킬 수 있냐는 사항이 자연스럽게 논의됩니다. 재미있고 흥미로운 작업들입니다. 자 다시 농경문 청동기를 유심히 살펴보십시오.” 청동 해설을 마친 선생님은 우리가 유물을 관찰할 수 있도록 시간을 준다. 청동기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남성숭배와 농사 그리고 요즘 패미니즘 경향과 산업 환경을 전반적 변화의 관계가 같이 생각난다. 힘든 농사일을 할때나 육체적인 힘으로 하는 전쟁 같은 것은 남자라는 성이 여성보다는 우세하지만 사무실에 앉아 있으면서 주위 사람들과 혹은 고객들과의 의사소통의 훨씬 중요시 하는 현대 사회는 어쩌면 농사가 시작된 이래에 처음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우세해 질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삼국시대의 신라관에 있어야할 유물이 이곳 청동기관에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청동기관 유물 중에 비파형 청동검이나 농경문 청동기 만큼이나 오히려 더 흥미로운 청동기 유물입니다. 금빛 찬란한 신라의 유물 중에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청동기 유물 바로 ‘광개토왕의 이름이 새겨진 청동 호우’ 입니다.” 청동그릇의 사진을 띄워놓고 선생님이 청동기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간다.
정확한 쓰임새는 알려진게 없지만 일종의 제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라 짐작되는 이 청동그릇의 바닥에는
#
乙卯年國 (을묘년국)
岡上廣開 (강상광개)
土地好太 (토지호태)
王壺杆十 (왕호간십)
라고 세로로 쓰여있다. 흥미로운 것은 한두 사실이 아닌데 우선 글씨체가 중국 집안에 있는 광개토왕비문과 동일하다. 그리고 발견된 곳은 신라의 거대 고분들이 밀접해 있는 경주 노서동 고분군이다. 호우총의 주변으로 은령총, 금관총, 서봉총 등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고분들이 즐비하다. 이 고분들의 주인들은 5세기 후반~ 6세기 이후의 신라 김씨왕들과 왕비일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왕의 무덤에서 광개토왕 사후 기념품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호우가 나온 것은 여러가지로 해석이 가능하지만, 당시 신라는 사실상 고구려의 속국이었고 고구려의 군대까지 왕경에 주둔하고 있었던 상태여서 종주국에서 속국으로 내려보내는 하사품일 수도 있고, 일설은 고구려에 오랜기간 볼모로 있었던 눌지마립간의 동생 복호를 신라로 돌려보내 주면서 그에게 내려준 장수왕의 선물이었을 수도 있다고 짐작된다.
고구려의 유물이 신라 왕의 무덤(아마도)에서 출토된 것은 당시 한반도의 정치적 역학구도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명문에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상징기호가 있는 것도 이 청동호우에 대한 이야깃 거리를 풍성하게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자 여러분 여기에 있는 것이 1946년 국내학자들에 의해서 발굴된 청동호우 입니다.” 학생들이 모여들기를 가만히 기다리던 박물관 선생님이 해설을 시작한다.
“호우총은 해방이 되고 처음으로 우리 학자들에 의해서 발굴이 된 무덤입니다. “
“명문이 잘 보이는데 명문에서 어떤 것을 알 수 있나요?”
“을묘년은 415년입니다. 광개토대왕이 돌아가신 해는 413년 계축년입니다. 추측이지만 을묘년은 이 호우가 제작된 시기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대체로 알수 있는 글인데 마지막의 ‘十’ 이 어떤 의미인지 유추적인 해석이 필요합니다.”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설명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으니 추측해 볼수 밖에 없어요. 열개를 만들었는데 열번째에 해당하는 그릇일 수도 있고, ‘십’ 이라는 숫자가 완전함, 온전함의 의미하니까 완벽한 존재였던 광개토대왕을 기리는 문구 일수도 있습니다.”
“물론 상상이지만 즐거운 것은 만약 열개를 만들어서 이 그릇이 10번째 그릇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나머지 9개는 어디에 있을까요? 만약 장수왕이 그릇을 광개토대왕이 정복하거나 다스렸던 지역 골고루 보냈다면 나머지 아홉개는 아마 중국과 지금 러시아 지역에 산재해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또 한가지가 ‘#’ 문양입니다. ‘#’ 은 그 뜻조차 제대로 있지 않아 ‘十’ 자 처럼 상상해 보는 것도 만만치 않습니다. 요즘은 샵 표시로 읽지않고 해시태그로 읽는다지요. 하지만 옛날에는 우물정자로 읽었습니다. 마을에서 우물이 차지하는 공간적 의미는 굉장히 큽니다. 요즘은 큰 쇼핑몰을 플라자라고 부릅니다만, 영어로 플라자(plaza)는 큰 광장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마을에서 광장은 사람들이 주로 모이는 장소인데 전통적인 사회에서 플라자는 주로 우물이 있던 장소입니다. 수도가 공급이 되면서부터 주로 그 우물터에 분수가 대신 자리잡게 됩니다. 우물이 있던 장소는 주로 사람이 머무는 곳이고 사람들이 모이면 무언가 일어나게 마련이지요. 신라의 천년 수도 경주를 상징하는 조형물은 첨성대 입니다. 첨성대를 보면 우물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신라인들은 천문대를 설치하면서 우물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를 했을까요? 이 뿐만 아닙니다. 신라를 건국한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이 나정(蘿井)이라는 우물터였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나정의 터를 발굴을 해보니까 우주를 상징하는 팔각형 모양의 구조물이 있었던 것으로 판명이 되어서 이곳이 단순한 우물이 아니라 신전이나 사당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우물터는 신령스러운 장소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장소였답니다. 물과 하늘이 접하는 곳이 바로 우물이고, 이 곳에서 하늘과 물이 조화로 천지만물이 생성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의 어머니는 유화입니다. 유화는 하백 (강을 다스리는 신)의 딸입니다. 주몽의 아버지는 해모수입니다. 해모수를 천신의 아들로 해모수는 해를 상징하는 하늘의 신입니다. 하늘의 신과 물의 신의 만남에서 태어난 자가 바로 동명성왕 주몽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자신들을 하늘의 자손이라는 천손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왕은 스스로를 ‘하박의 손자요. 일월의 아들 (河泊之孫 日月之子)’ 이라고 불렀답니다. 결국 하박의 손자, 일월의 아들 (河泊之孫 日月之子)을 상징하는 것이 우물이고 이를 줄여쓴 표식이 # 인 셈입니다.”
“청동호우의 명문의 해석은 물을 다스리는 하백의 손자이고, 해와 달의 신인 해모수의 아들인, 국강상 지역에 묻힌. 널리 국토를 넓히신 크신 왕을 기념하기 위한 열번째 호우 라는 뜻이 됩니다.”
“청동기 유물중에 정(鼎, 솥)이 많습니다. 제사를 지내는 제기였기도 하고, 큰 솥을 가진자는 사냥에서 잡은 고기를 삶아서 분배하는 역할을 했던 사람이기도 합니다. 고기를 나누어 주는자, 부를 나누어 주는 권력을 가진 지배자를 뜻합니다. 광개토대왕의 호우 역시 이러한 의미를 가졌을 테고 그의 사후에 그 살아생전 지배했던 지역의 진정한 권력자가 누구였다는 것을 명확히 하는 상징물을 보낸 것이었습니다. 호우의 바닥에 그 권력자가 하백의 손자요 해와 달의 아들이라는, ‘천손’, 의 혈통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 설명을 듣고 다시 쳐다보는 청동 호우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 보인다. 사랑하게 되면 알게되고 알게되면 그 이전과는 확연히 다르다. 국립중앙박물관은 현대판 피라미드이고, 진시황의 병마용이다. 이 무덤은 지배자 한사람을 위한 무덤이 아니라 삼천년의 역사를 아우르고 그 시절을 살다간 이들의 무덤이다. 그리고 이 무덤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이고,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