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평범한 토종 한국남자의 해외 취업도전 이야기
1. 시작은 힘들다. 하지만 반이다.
대학 시절 나는 소위 스펙을 쌓는 학생보다 대학 생활을 즐기는 학생이었다. 우연히 카투사에 가게 되어 영어로 말 한마디를 못 하는 학생에서 영어 회화가 조금 가능한 수준까지 올라간 것을 제외하면, 스펙이라고는 전무했다. 하지만 나는 대학 시절 모든 것을 누리고 싶어했기에 동아리 활동, 교내 및 교외 봉사와 해외 탐방 같은 활동을 주로 했고, 교환학생도 홍콩으로 가게 되었다. 한 번쯤은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어서 4학년 2학기 취업을 준비하면서 캐나다 워킹홀리데이까지 준비하였고 비자까지 나온 상태였다. 그러한 와중에 교내 취업 담당 선생님들의 도움으로 2017년 졸업을 하자마자 가장 원하던 외국계 반도체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업에 성공했다. 나의 자존감과 자만감이 하늘을 찔렀고 무엇을 하든 성공을 할 것만 같았다. 해외에서 근무해보는 내 꿈은 없어지겠지만 내가 원하던 기업인 만큼 남은 인생은 평생 이 회사와 함께 할 것 같았다.
그러한 기대감이 무너지는 데는 3개월도 안 걸렸지만 말이다. 누군가에게 최고의 직장은 누군가에게는 하루하루 버티기 힘든 현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겪고 나서 알게 되었다. 인턴 및 사내 문화에 경험이 전혀 없던 나에게 국내의 반도체 엔지니어는 전혀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았다. 처음부터 다시 하고 싶었다. 컴퓨터와 같은 리셋 버튼이 있다면 다시 눌러 대학교 1학년 때로 돌아가서 새로운 선택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돌아간다 해도 변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모르기에. 그렇기 때문에 더욱더 새로운 것을 보고 싶은 간절한 마음과 직장 생활에 지치고 힘든 감정이 섞여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찾아봤다.
직장 생활을 하며 새로운 것을 찾고자 모교 대학교 홈페이지를 둘러보던 내가 발견한 WEST 프로그램은 대학 시절 내가 꿈꾸지만 못했던 내 어린 시절 장래 희망과 같았다. 바로 지원요건을 살펴보고 오픽 시험을 급하게 신청해 마감 이틀 전 간신히 제출하였다. 이후 인터뷰를 걸쳐 선발되었고 미국 캘리포니아 LA 행 티켓을 거머쥐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 미국을 가게 된다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와서 전과 같은 직장 생활을 할 수 없을 것을 알았기에 내 미래를 건 선택을 해야만 했다. 교수님과 선배들을 다시 찾아가 내가 맞는 선택인지 물었다. 그 누구도 나에게 확실한 답은 주지 못하였으나, 한 교수님의 말이 뇌리를 스쳤고 결정을 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나와 같이 시작한 친구 중, 도전을 한 녀석들이 있었지. 그 녀석들은 중간에 고비도 많았지만, 결국에는 나보다 더 잘살거나 나만큼 살고 있더라고. 도전하는 것은 전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해"
다음 날 회사에 통보하였고 미국으로 떠나기 7일 전 나는 내가 가장 원했던 회사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정리하고 결국 1년 만에 퇴사하게 되었다.
2. 준비되지 않은 자에게 낙원은 없다.
행복한 미국 생활은 길지 않았다. 3개월간의 짧은 어학연수로 자유로움과 여유를 맛보고 있던 나를 좌절의 구렁텅이로 빠트린 것은 인턴 구직 실패였다. 자만한 마음으로 인턴 구직을 기다렸으나, 생각과는 다르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 급한 마음에 무작정 실리콘밸리가 있는 샌프란시스코로 버스를 타고 가서 구직 활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나는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나의 이력서는 엉성했고 커버 레터는 형편없었다. 나는 한글로 에세이 형식의 자소서를 쓰는 것에는 익숙했지만, 영어 이력서와 커버 레터를 쓰는 것은 아직 익숙지 않았다.
누구도 한국에서 온 1년 경력을 가진 하드웨어 엔지니어를 채용하려 하지 않았다. 6개월이라는 인턴 기간은 회사들이 나에게 기회를 주고 성장시키는데 정당성을 주지 않았다.
계좌에 남은 돈을 확인하며 나의 수명을 확인하던 중 우연히 비자 스폰서로부터 샌프란시스코 근처의 한 IT 회사에서 연락이 왔고 바로 이틀 후 면접을 보라고 했다. 짧은 시간 내에 어떠한 회사인지 홈페이지를 통해 확인 후 차를 빌렸고 정장을 입고 달려갔다. 인터뷰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열정을 보였고 추가로 엉성한 커버 레터와 내 비장의 무기였던 전 직장 매니저의 추천서를 보여주었다. CEO는 만족한 눈치였고 다음 날 채용 소식을 들어 새로 이사 준비를 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에서 가장 집값이 높기로 소문난 곳이다. 나의 회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지하철로 마지막 정거장에 해당하는 위치였는데, 그런데도 방 하나의 비용은 한 달에 1,000달러(한화 120만원)를 기본으로 넘었다. 첫 출근 전 에어비앤비를 사용해 5일간의 여유를 두고 방을 보기로 계획을 하였다. 에어비앤비의 비용이 굉장히 비쌌기 때문에 하루빨리 집을 찾아야겠다는 마음이 나를 압박하였다. 내가 집을 구하던 날은 캘리포니아 산불에 의한 미세먼지로 인해 하늘이 빨간 날이었는데 이날 3시간가량 걸어 다녔던 것 같다. 결국에 1,200달러에 방을 계약하고 첫 출근을 준비하였다.
VR 기능을 사용한 시력 보조 기구를 만들던 IT 스타트업 회사는 실리콘밸리에 스타트업 분위기에 맞는 젊음과 다양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양한 인종과 활기 넘치는 분위기가 흡사 대학교 캠퍼스에 온 듯한 분위기를 주었다. 근무 시간에 넷플릭스도 보고 젠가도 했으며 불닭볶음면을 사서 핫누들 챌린지도 하였다. 하루는 버거킹 치킨너겟을 1달러에 10개씩 총 20달러 치 사서 치킨너겟 200 챌린지도 하였다.
하지만 모든 것이 행복한 것은 아녔다. 나의 전 회사 동기들은 모두 회사 내에 어느 정도 시니어 위치가 되어 안정적인 직장 생활을 하고 있었고 나와 다르게 많은 돈을 저축하며 값비싼 취미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그에 비해, 나는 먼 나라에 혼자 떨어져, 비싼 의료비에 아픈 것을 걱정하고, 치아가 시린 날이면 온종일 신경이 쓰여 아무것도 하지 못하였다. 무급으로 시작했던 나는 내가 가져온 돈을 쓰고 있었으며 계획대로라면 미국 온 지 1년 안에 모든 저축자금을 소진할 것이 뻔했다.
회사 동료들과 점심을 먹고 나면 항상 커피를 들고 회사 뒤에 인적이 드문 뚝방에 홀로 가서 내가 잘하고 있는가에 대한 회의감과 불안감을 이겨내고 와야만 했다.
1달이 지나고 나는 CEO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나는 많은 노력을 가했고 이 지역은 비싼 지역이니 급여를 받기 원한다. 나의 요청을 다행히 받아졌고 적지만 도움이 될만한 급여를 받게 되어 어느 정도 걱정은 덜어두고 좀 더 미국 생활을 즐길 수 있었다.
내가 원하던 실리콘밸리 근처의 IT 회사에 들어와 새로운 것을 배울 수 있었으나 내게 주어진 일은 다소 단순한 일이었기에, 아직 내가 미국 산업 및 미래 커리어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줄 수 없었다. 따라서 나는 샌프란시스코 내 한인 연말 파티 및 기업에서 하는 세미나들을 찾아다니며 새로운 것을 들으려 노력했다. 회사에 휴가를 쓰고 LA지역에 있는 컨벤션에 참가하기도 했고 캘리포니아에서 일하던 일면식도 없는 대학 선배님에게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하여 만나서 조언을 구하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진로 방향 및 정보는 들을 수 있었으나 내가 원하는 대답을 아직 찾지는 못하였다.
3. 현실을 다시 느끼기
완전한 해답을 찾지 못한 나는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 거의 바닥 난 나의 잔고와 다시 떨어진 나의 자존감을 어떻게든 올려야만 했다.
여러 조언과 대세에 따라 머신러닝과 빅데이터를 공부하였고 월드잡을 통한 해외 취업 박람회와 지자체 주관 취업 부스 등을 찾아가 인터뷰를 요청하였다. 하지만 어설픈 한국 1년 경력과 미국 인턴 경력을 가진 나에게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취업 부스를 통해 얻게 된 엔지니어 1년 계약직 인터뷰는 최종 단계에서 떨어지게 되었다. 운이 좋게 피드백을 얻게 되었는데 납득이 갔다.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지 못한 나에게 다시 엔지니어로 돌아가려고 하니 현실과 타협하여 다시 돌아가려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하루는 독일 취업 박람회를 가게 되었는데, 그 옆 건물이 서울 해외 취업센터 사무실인 것을 알게 되고 나는 무작정 찾아가 싱가포르 취업 상담을 요청했다. 그 전에 싱가포르 취업에 대한 긍정적인 얘기도 들었고, 연락은 오지 않지만 여러 번 지원했었기에 구직 실패의 원인과 현황이 너무 궁금하였다. 상담 후 한국에서 지원하는 것보다 현지에 가서 지원하는 것이 더욱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고 비행기를 찾아 2달간의 싱가포르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다.
4. 다음 종착역은 싱가포르
싱가포르에 2달 동안 8명이 자는 호스텔에 싼 가격에 지낼 수 있게 되었고, 떨어진 자존감과 정해진 예산 내에 활동하기 위하여 전략적으로 되어야 했다.
하루에 다섯 개 이상의 회사에 지원하는 것을 시작으로 언어교환 및 달리기 모임에도 나가 육체 활동과 사교모임도 빠지지 않았다. 싱가포르는 인맥이 취업의 중요 수단이 된다고도 들었으나 한국에서 무작정 날라와 짧은 기간 내에 직업을 구하던 나를 보증하고 신뢰를 하여 추천을 해준다는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오히려 싱가포르 생활을 시작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되었다.
호스텔에서 아시아를 떠돌며 버스킹을 하던 터키 친구부터 MIT 박사과정을 밟고 있던 일본 친구까지 다양한 사람을 만나며 오히려 미국보다 더 색다른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운이 좋게 2주 만에 한 헤드헌팅 회사에서 계약직으로 연락이 왔고, 테스트를 요청하였다. 나는 5일 안에 300페이지에 가까운 책을 읽고 시험을 봐야 했으나, 상당히 흥미로운 내용이 많았기 때문에 대학교 시험을 보듯 공부하여 40시간에 걸친 테스트를 마치고 마지막 인터뷰 후 합격하게 되었다. 다만 비자가 문제였는데, 싱가포르에서 외국인이 취업비자를 받는 것은 다른 나라에 비해 정말 낮은 난이도지만, 좋은 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나이, 연봉 및 경력, 심지어 학력까지 요구한다.
나의 입사 조건은 최고 비자를 받아야 하므로 비자가 나오기 전까지 2주 동안 매일 들어가 확인을 하다가 정확히 2주가 되던 날 승인이 나서 짧은 한국 휴가를 즐긴 후 돌아와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일하기 위해 싱가포르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나의 잔고는 0원에 수렴했으므로 신용카드를 이용해 빚까지 지어가며 고시원보다 작은 방에서 어디서 물린지 모르는 빈대의 공격으로 퉁퉁 부은 채 시작을 하게 되었다.
5. 마침내 원하는 것을 찾기
2021년 7월 기준으로 현재 일을 한 지 2년이 되었다. 싱가포르에 오기 전 나에게는 3가지 조건이 있었는데 2가지만 맞으면 무조건 선택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첫 번째 나라, 두 번째 직무, 세 번째 산업이었다. 운이 좋게 나는 원하던 싱가포르에 이직하였고 원하는 포지션인 데이터 잡을 IT 회사에서 시작하게 되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이뤘으니 전혀 아쉬움이나 불만족은 전혀 없었으며 하루하루 내가 일하고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특히 2020년은 특이한 해인데, 코로나바이러스가 터진 이후 3월부터 재택근무를 시작해 현재(2021년 7월)까지 계속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계산해보면 내가 입사 후 사무실에 있던 시간보다 집에서 일한 시간이 많은 건데, 많은 구직자 및 서비스 업종 종사자들이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내게 주어진 것들에 매우 감사하며 지내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지내며 좋은 사람들과 살고 있으며, 요리에 취미가 생겨 사람들이 놀랄만한 요리 솜씨도 개발하였고 운동도 더 열심히 해서 기존 개인기록도 갱신하고 있다.
싱가포르는 매우 안전하고 해외 취업자들에게 문이 열려있는 나라이다. 현재 2021년 기준으로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신규 해외 유입자들의 문이 좁아졌으나 언젠간 다시 열리리라 생각한다. 또한, 싱글리시라는 난해한 영어를 사용하기는 하나 모든 기반 시설이 영어로 되어있어, 외국인으로서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거나 불편한 경우는 전혀 없다. 중국어 및 다른 나라의 언어를 배우고 싶다면 충분히 배울 수 있는 나라이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에 관해 관심이 매우 많아, 한류를 쉽게 찾아볼 수 있으며, 한국인에 대한 호기심이 많아 다가가는 데 어려움이 없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그러하듯, 외국인 근무자들에게 자국민들과 같은 혜택을 주려 하지 않고, 구직 시장이 유동적인 장점이 있는 나라에 역설적으로 판데믹과 같은 위기 상황에 해고된다고 하면 바로 일주일에서 한 달 내로 짐을 싸서 본국으로 떠나야 하는 게 외국인 근로자의 아픈 현실이다.
주니어 레벨에서 커리어 면으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국과 같이 사수가 직접적으로 도움을 주는 한국이 더 도움이 될 수가 있다. 실제로 한국에서 배운 것이 아직도 내 커리어에 영향을 주고 있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내가 일한 만큼의 성과와 피드백이 돌아오는 나라이기에 욕심이 있다면 싱가포르에서 단기간 내에 빠른 성장과 승진을 이룰 수 있다.
6. 끝은 없다.
나는 세 나라의 구직활동과 근무를 해보았고 회사 지원부터 부동산 계약까지 모두 도움 없이 내 손으로 찾아야 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어디서부터 시작하지, 어떻게 하지, 안되면 어쩌지라는 걱정과 불안감이 앞섰다면 지금은 내가 어디를 가도 무슨 일을 하더라도 다시 충분히 해낼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이 먼저 들게 되었다. 끝없는 실패와 성공은 나를 지속해서 발전 시켜 주었기에 이 글을 보고 있고 도전을 준비하는 분이라면, 특히 해외 취업을 준비하는 학생 및 직장인이라면 반드시 도전해봐도 좋다고 생각한다. 다만 많은 결심과 준비가 필요했던 것 같다.
해외로 취업하고 싶은 이유가 커리어의 발전 및 새로운 경험이라면 한국에서의 윤택한 삶과 안정적인 환경을 버려야 하는 선택을 할 수도 있다. 만약 한국에서 직장 생활 및 구직 활동에 도피처로 해외 취업을 선택하게 된다면, 그 또한 해외 취업은 돌파구가 될 수 있고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준비와 각오 없이 무작정 오게 된다면 크나큰 실패와 좌절감에 자존감을 하루하루 바닥을 치며 귀국하는 내 모습을 볼 수도 있다.
많이 검색하고 준비하고 물어보는 것에 익숙해져라. 다른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이 어렵던 나도 링크드인을 통해 연락해 만나서 물어보고 다양한 모임에 나가서 적극적으로 교류하며 해외 생활에 준비했다. 그 결과, 기준에 따라 아무것도 아닌 결과를 받았을 수 있으나, 나 자신에게 너무 당당하고 자랑스러운 사람이 되었다.
물론 나 또한 앞으로의 계획을 계속 설계하고 있다. 금전적으로 또한 포지션으로 여러 가지 가능성 및 목표를 정해두고 있으며 현재 다양한 방법으로 실현하고 있다. 물론 내 계획 중에 한국으로 귀국 및 다른 나라로 다시 옮기는 것 또한 포함되어 있다.
특히 올해 뼈저리게 느낀 점인데, 갑작스럽게 변하는 세계 정황이나 나라의 정책으로 인해 구직 상황에 변동이 생기거나 내 계획에 차질이 생길 경우, 내가 생각하던 것 이외에 다른 방법도 빠르게 전환하는 유연한 사고가 필요한 시기인 것 같다.
따라서 여러분들도 지금 쉽지 않은 시기에 구직 활동 및 인생 설계를 하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해외 취업을 생각하신 분들은 잘 준비하셔서 다가오는 기회를 적극적으로 쟁취하시길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