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서 1장
초저녁, 산마루에 오른 청년은 지는 해를 바라보고 있었다.
붉은 기운이 능선을 따라 느리게 번졌고, 바람에는 마른풀 냄새가 섞여 있었다.
세상이 바뀌고 있다는 말은
이미 이 산에도 닿아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고요가 마지막 숨처럼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아래쪽에서 뒤틀린 함성과 쇳소리가 뒤엉켜 올라왔다.
곧이어 어둠 속에서 불길이 터졌고,
사찰이 있던 산자락 위로
검은 연기가 한 번에 솟구쳤다.
불이었다.
청년은 더 보지 않았다.
지켜온 곳이 불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산마루를 떠나 비탈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불길은 점점 가까워졌고, 연기는 밤공기 속에서 숨을 막았다.
길에 접어들자 가장 먼저 코를 찌른 것은
향이 아니라 타들어 가는 살과 나무의 냄새였다.
돌길 위엔 시신들이 흩어져 있었다.
찢긴 도포, 뒤틀린 팔다리, 짓밟힌 염주.
기도와 숨이 멈춘 자리였다.
칼이 돌아간 뒤,
밤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연기 너머에서 붙잡힌 사내 하나가 보였다.
사찰의 주지스님이었다.
두 군사가 팔을 붙잡은 채,
그의 몸을 불붙은 돌바닥 위로 끌고 가고 있었다.
“주지스님…!”
청년의 발이 멈췄다.
주지스님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불빛에 비친 얼굴은 기이할 만큼 고요했다.
“하늘은 인간의 위에 있지 않다.”
군사 하나가 침을 뱉듯 말했다.
“입 다물어라, 늙은이.”
그러나 목소리는 꺾이지 않았다.
“하늘은 멈출 것이다.
그날, 인간이 걷지 않으면—
세상은 어두워진다.”
짧은 명령이 떨어졌다.
“처형하라.”
칼은 주저하지 않았다.
핏빛이 돌계단을 타고 번졌고,
주지스님의 몸은 소리 없이 무너졌다.
그 순간,
연기 사이로 한 소녀가 비틀거리며 뛰쳐나왔다.
찢긴 옷자락에 재가 들러붙어 있었고,
손에 쥔 짧은 칼이 떨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아직 밤에서 돌아오지 못한 채였다.
“내 가족을 죽인 자들이다…”
목소리는 울음과 분노 사이에서 갈라졌다.
“가만두지 않겠다.”
소녀는 무모하게 달려들었다.
칼끝이 허공을 가르며 흔들렸고,
장수의 검이 서슴없이 그녀를 향해 내려왔다.
그 찰나,
청년의 칼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쇳소리가 밤을 찢었다.
한 치 앞에서 검이 멈췄다.
청년은 이를 악문 채 장수를 올려다보았다.
왜 하늘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가,
그 질문이 가슴 한편에서 처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연기 너머로 깃발이 흔들렸다.
검은 문양 아래, 갑옷을 두른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군사들 사이에서 낮은 소리가 퍼졌다.
“청룡장군님…”
청룡의 눈은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그 시선 어딘가에
아주 짧은 멎음이 스쳐 지나갔다.
그는 말했다.
“다 하늘의 뜻이다.”
잠시 숨을 고른 뒤, 덧붙였다.
“나는 그 뜻을 따를 뿐이다.”
그 말은 밤공기 위에 차갑게 내려앉았다.
청년은 소녀 앞에 서서 칼을 세웠다.
그의 시선이 하늘을 향했다.
달빛은 연기에 가려 있었고,
별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 대답도 없었다.
고요.
숨 막힐 만큼 깊은 침묵.
그 밤,
하늘은 침묵했고
인간의 피만이 대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청년의 안쪽 어딘가가
조용히 굳어갔다.
이 시대의 하늘은 이미,
멈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