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서 2장
사찰의 불빛이 뒤로 멀어질수록 어둠이 길을 잠식했다.
주지의 마지막 숨과 함께 멎은 침묵이
산허리의 찬 공기 속에 가늘게 매달려 있었다.
청년과 소녀는 그 침묵을 가르며 비탈을 내려섰다.
등 뒤에서는 군사들의 함성이 희미해지고 있었지만,
끝나지 않은 기척이
등뼈를 따라 서늘하게 기어올랐다.
소녀의 손은 떨렸고 눈가엔 재가 번져 있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살아야 해요.”
다짐이 아니었다.
잿더미 위에서
몸이 먼저 토해낸 숨이었다.
그때,
능선 위의 공기가 먼저 갈라졌다.
쇳소리가 터졌고,
불꽃같은 시선이 어둠을 꿰뚫으며 내려왔다.
청룡이었다.
그의 걸음엔 급함이 없었다.
땅을 밟는 소리조차
주변보다 반 박자 늦게 도착했다.
사냥이 아니라,
이미 끝을 알고 있는 자의 보폭.
“도망치는가.”
웃음에 가까운 숨이 흘렀다.
“좀 더 노력해야 하지 않나.
그래야… 살아남지.”
청년은 물러서지 않았다.
소녀를 등 뒤로 밀어내고 몸을 낮췄다.
기억 어딘가에 남아 있던,
그러나 이미 이름을 잃은 검술의 자세.
몸이 먼저 반응했고,
머리는 뒤늦게 따라왔다.
첫 격돌.
쇳소리가 밤을 찢었다.
손목이 먼저 울렸고
그제야 소리가 따라왔다.
청룡의 검이 파고들었다.
청년은 비스듬히 흘렸지만,
힘의 차이는 피부보다 먼저
뼈에 와닿았다.
일격이 어깨를 스쳤다.
살이 찢기는 감각보다
팔이 자기 것이 아닌 듯한 이질감이
한 박자 늦게 밀려왔다.
청년은 이를 악문 채 다시 칼을 들었다.
검이 맞부딪힐 때마다
숨은 짧아졌고,
차가운 밤공기가 폐를 긁고 지나갔다.
불꽃이 튀었고,
공기가 한순간 움찔했다.
청룡의 눈이 아주 잠깐 느려졌다.
검의 흐름 앞에서
그의 시선이 한 박자 늦게 움직였다.
그 틈을 따라
검이 비틀어졌다.
청년의 검끝이 밀려나며
중심이 무너졌다.
그 순간,
소녀의 손이 번개처럼 움직였다.
날 선 암기 하나가
청룡의 관절을 향해 날아들었다.
청룡은 몸을 틀어 피했다.
그러나 스친 바람이
그의 옷자락을 베고 지나갔다.
아주 짧은 틈.
“지금이야!”
청년은 소녀의 손목을 붙잡아 끌며
숲 속으로 몸을 던졌다.
나무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갈라졌고,
뒤편의 사찰 불빛은
점점 작아졌다.
뒤에서 다시 한번 칼바람이 스쳤다.
이번엔 소리가 나지 않았다.
소리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그 검이 얼마나 가까웠는지
몸이 먼저 알았다.
그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청룡은 한 걸음 멈춰 섰다.
어깨에 내려앉은 재를 털며
숲을 바라보았다.
“미완이군.”
낮은 웃음이 흘렀다.
“그래서 더 오래 남겠지.”
그는 검을 거두지 않았다.
다만 더 쫓지 않았을 뿐이었다.
청년과 소녀는
숲의 가장 깊은 곳까지 달려
그제야 멈춰 섰다.
숨이 가빠 손바닥은 땀으로 미끄러웠고,
칼끝이 미세하게 흔들렸다.
청년은 아무 말 없이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피인지, 땀인지
구분되지 않는 습기가
검자루에 남아 있었다.
이 검으로
지켜낼 수 있는 것이
아직 무엇인지
몸은 알지 못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늘 밤 이후
이 몸은 예전처럼
검을 잊지 못하리라는 것.
그 뒤편에서,
불타는 사찰의 붉은 숨결만이
멈춘 하늘 아래에서
느리게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