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서 3장
숲은 더 깊어졌고, 밤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불길의 흔적도, 청룡의 기척도
이제는 바람 뒤편으로 밀려난 기억처럼 멀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한참을 더 달린 뒤에서야 멈춰 섰다.
청년의 숨은 거칠게 갈라졌고,
연의 어깨는 아직도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한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서로의 숨결만이
어둠 속에서 맞부딪히며
서로를 붙들고 있었다.
잠시 후,
그가 먼저 고요를 깨뜨렸다.
“왜 말렸냐.”
연의 시선이 땅으로 떨어졌다.
“내가 안 도왔으면…
너 죽었어.”
말끝이 아주 미세하게 흔들렸다.
연은 발끝으로 흙을 짓이기듯 눌렀다.
“그 장수…
넌 혼자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청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래도 네가 나설 이유는 없었어.”
연의 숨이 짧게 끊겼다.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고?”
목소리가 날카롭게 튀었다가
곧 힘없이 가라앉았다.
“그 사람들…
내 가족을 죽였어.”
울부짖음도, 분노도 없었다.
여러 번 무너진 뒤
겨우 남은 숨 같은 소리였다.
청년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한다.”
위로도, 다짐도 아니었다.
살아남은 자만이
마침내 입 밖에 낼 수 있는 말이었다.
연의 입술이 작게 떨렸다.
“살아 있는 게…
제일 힘들 때도 있어.”
그 말은 바람보다 낮았고,
마음보다 깊었다.
잠시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밤은 한층 더 짙어졌다.
이윽고 연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름이 뭐야.”
청년은 대답하지 않은 채
어둠을 바라보았다.
손에 쥔 검자루가
아주 잠깐 더 단단해졌다.
“… 아직은 밝힐 때가 아니다.”
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겠다는 선택이
눈빛에 담겨 있었다.
“난 연이야.”
잠시 머뭇거리다
그녀는 말을 이었다.
“부모님이 그랬어.
무슨 일이 생기면…
남쪽 산 너머,
물안개 걷히는 마을로 가라고.”
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은 보이지 않았다.
“거기가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가야겠지.”
연의 손이 천천히 주먹을 쥐었다.
그 안에는 증오도, 분노도 아닌
겨우 놓지 않은 숨 하나가 들어 있었다.
그 밤,
그들은 달리는 자가 아니라
살아남으려 애쓰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숲의 가장 깊은 자리에서
이 세상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조용히 다시 숨을 쉬고 있었다.
그들은 말없이 다시 걸었다.
공기가 먼저 식었다.
나뭇잎 사이로 흐르던 밤의 결이
조금 느려졌다.
숲의 숨결이 옅어지고,
낙엽 밟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질 즈음
어딘가에서
쇠의 떨림이 길게 번졌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고,
밤은 다시
숨을 삼키기 시작했다.
나무 사이로 쇳소리가 스며들자
어둠의 결이
느리게 흔들렸다.
하늘은 여전히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 침묵 아래에서
무언가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