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문, 바람 아래의 기억

by 연월랑

회색 돌 위로 바람이 스친다.

벽돌의 틈마다 세월의 먼지가 잠들어 있고,

낡은 성루 아래로 사람들의 그림자가 흘러간다.

이곳은 오래전부터 바람이 머물던 자리,

시간이 들고 나는 문턱이다.


나는 오래된 문이다.

사람들은 나를 동대문이라 부른다.

그러나 바람이 내 어깨를 스칠 때마다

내 본래의 이름, 흥인지문이 속삭이듯 깨어난다.

이름이 바뀌어도 바람은 같은 길로 지난다.

그렇게 나는, 오래 전과 지금 사이에서 숨을 쉰다.




처음 돌이 쌓이던 날,

들판의 냄새가 골목까지 번져왔다.

새벽마다 닭이 울고,

사람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성을 오갔다.

그들의 웃음이 돌에 닿을 때마다

바람은 잠시 머물렀다.




세월이 흘러 문 밖으로 장터가 열렸다.

쌀자루와 기와, 천 조각, 흥정의 목소리들.

햇살이 골목 끝을 비추면

사람들의 하루가 그 빛 위에서 번져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성벽의 돌이 차례로 허물어졌다.

길을 넓히기 위해서라 했지만,

돌 틈에서 나는 희미한 울음소리가 들렸다.

편리함은 언제나 기억의 자리를 조금씩 지워간다.




전쟁의 바람이 불어오던 해,

하늘은 불길로 물들고

성루는 그을음에 젖었다.

돌이 타는 냄새,

붉은빛이 번지는 저녁.

사람들은 서둘러 피난길에 올랐고,

그 발자국의 진동이 아직도 벽 안쪽에 남아 있다.




불길이 사라진 뒤,

누군가의 손끝이 다시 돌을 닦았다.

검게 그을린 벽 위로

작은 온기가 번졌다.

돌마다 새로운 숨결이 깃들고,

바람은 그 틈을 따라 다시 흘렀다.




지금은 유리와 빛의 건물이 맞은편에 서 있다.

밤이면 그 불빛이 성루의 돌 위에 반사되어,

마치 별빛이 내려앉은 듯 흔들린다.

젊은이들은 그 아래에서 웃고,

미래의 이야기를 나눈다.

과거의 돌이 미래의 빛을 비추는 세상,

이 도시는 그렇게 시간을 이어간다.




비가 내리면 돌 위의 먼지가 젖고,

흙냄새가 골목 사이로 피어오른다.

바람은 그 냄새를 품고,

오래된 이야기를 다시 꺼내어 흩뿌린다.


기억은 사라지지 않는다.

모양만 바뀌어 다른 언어로 다시 살아난다.

오늘도 사람들은 이곳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버스의 그림자가 돌 위를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불어오는 바람 한 줄기 속엔

옛 장터의 흙냄새가 아직 남아 있다.

시간은 지나가도,

돌의 숨결은 여전히 이 도시를 지탱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