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아침, 정류장 바람은 귀 끝부터 먼저 스며들었다.
숨을 내쉬자 허옇게 번진 김이 잠시 흔들리다 사라졌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손끝은 금세 감각을 잃었다.
정류장은 늘 같았다.
서리 낀 차창을 긁는 손길,
손난로를 쥔 아주머니,
지각이 두려워 달려오는 학생들.
그 속에서 나는 매일 같은 얼굴을 찾고 있었다.
회색 머리끈으로 묶은 머리, 손에 작은 단어장.
가방 끈 고양이 열쇠고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작은 방울소리를 냈다.
아주 잠깐, 세상이 고요해지는 순간이었다.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인사를 다짐했지만,
혀끝에 맴돈 인사는 끝내 소리로 바뀌지 않았다.
그저 바람만이 내 대신 말을 건넸다.
그러던 날, 그녀의 단어장이 바람에 굴러와 발끝에 멈췄다.
나는 저도 모르게 그것을 집어 들고 내밀었다.
“여기요.”
손끝이 닿는 찰나, 작은 불씨가 심장 속에서 번졌다.
“고마워요.”
그 한마디가 종일 귀 안에서 울렸다.
며칠 뒤, 버스가 크게 흔들리던 순간
그녀가 내 쪽으로 기울었다.
본능처럼 손을 뻗었다.
“조심해요.”
내 목소리가 먼저 떨렸다.
그리고 어느 날,
정류장에서 그녀가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몇 대나 지나갔지만 나는 타지 못했다.
빈자리만 눈에 남았다.
얼마 뒤, 골목 모퉁이에서 그녀를 다시 보았다.
바람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스치며 지나갔고,
그녀는 잠시 고개를 돌리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갔다.
손을 내밀려는 찰나, 버스 문이 닫혔다.
“저기…!”
그 한마디가 허공에 터지고,
내 손끝은 허무하게 내려앉았다.
시간이 흐른 뒤,
버스 창가에서 낯익은 뒷모습을 보았다.
은빛처럼 반짝이는 고양이 열쇠고리,
햇살이 닿을 때마다 그녀의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제야, 내가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녀는 내 안에 남은 뜻 모를 낱말처럼,
소리로 닿지 못한 문장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모를 것이다.
같은 바람 속에서
우리의 시선이 스쳐 지나가던 그 시간들을.
그리고 그 겨울, 다른 쪽에서도 같은 바람이 불었다.
초겨울 아침, 정류장은 여전히 매서웠다.
길 건너 포장마차의 김이 바람에 흩날렸다.
나는 이어폰을 꽂은 채 단어장을 펼쳤다.
겉보기엔 음악을 듣는 듯했지만,
귓속은 조용했다.
종이를 넘기는 소리만 또렷하게 들렸다.
그 침묵 속에서 이상하게, 그의 존재만은 선명했다.
검은 가방끈을 잡은 큰 키의 남학생.
나는 모른 척했지만,
그의 시선이 내 어깨 끝에 머무는 걸 알았다.
어깨 위 공기가 미세하게 달아오르던 순간을.
말을 걸고 싶었다.
입술이 아주 작게 움직였다.
“춥네요.”
그 말은 바람에 섞여 사라졌고,
그의 시선은 여전히 먼 곳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던 날, 단어장이 바람에 날려 그의 발끝에 닿았다.
그가 허둥대며 집어 들어 내밀었다.
“여기요.”
그 짧은 손끝의 닿음이 마음 안에서 오래 흔들렸다.
“고마워요.”
그 한마디가 파문처럼 번져 하루 종일 따뜻했다.
며칠 뒤, 버스가 덜컥 흔들릴 때
그의 손이 내 손목을 붙잡았다.
“조심해요.”
그 목소리가 낯설게 떨렸지만, 이상하게 안심이 되었다.
겨울이 깊어갈 무렵, 나는 다른 동네로 이사했다.
정류장을 마지막으로 스치듯 지나칠 때,
나는 괜히 고개를 돌렸다.
혹시 그가 서 있을까…
그러나 그곳은 텅 비어 있었다.
몇 주 뒤, 버스 창가에 앉아 창밖을 보았다.
패딩 차림의 그 남학생이 정류장에 서 있었다.
겨울 햇살 속에서, 나와 같은 은빛 고양이 열쇠고리가 바람에 흔들리며 짧게 울렸다.
버스는 곧 멀어졌고,
나는 이름 하나라도 물어봤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했다.
그 아쉬움이 늦게 파고들었다.
창에 비친 내 입술은
아직도 그 이름을 부를 듯이 머물러 있었다.
정류장은 여전히 같은 자리에서 사람들을 기다린다.
수많은 얼굴이 스쳐가지만,
어떤 인연은 이름조차 알지 못해도 오래 남는다.
마치 단어장 속 뜻 모를 낱말처럼,
소리로 닿지 못해도 마음속에 새겨져
계절이 바뀔 때마다 불현듯 떠오른다.
스쳐간 만남일 뿐이지만,
그 기억은 겨울 새벽 정류장의 불빛처럼
차가운 공기 속에서도 길을 비춰주고,
고양이 열쇠고리의 맑은 소리처럼 오래 남아
지금도 바람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다.
불리지 못한 이름으로,
서로의 마음속에서 여전히 말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