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오랜 겨울의 그림자 속에서 천천히 깨어났다.
얼음 아래로 스며든 햇살이 그의 몸을 감싸자,
나는 미세한 떨림 속에서 눈을 떴다.
처음 본 세상은 투명했다.
바람은 유리처럼 맑았고,
그의 숨결은 아직 봄의 온도를 품고 있었다.
나는 그의 가지 끝에서 조심스레 피어났다.
그의 온기가 내 안으로 번질 때,
세상은 빛의 결로 물들었다.
그는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나는 들었다.
햇살이 그의 몸을 스치는 소리,
바람이 내 결을 흔드는 울림.
사랑은 그렇게,
소리 없는 숨결로 이어졌다.
여름빛이 깊어지며
비는 그의 어깨 위로 고요히 내려앉았다.
나는 그 위에서 작게 흔들리며,
젖어드는 그의 그림자를 보았다.
햇살이 돌아오면
내 몸의 물방울이 미세한 무지개를 품었다.
그의 존재는 내 안의 하늘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늘은 갑자기 어두워졌다.
바람이 거칠게 울었고,
큰비가 가지와 잎을 흔들었다.
나는 그를 붙들고자 했지만,
번개가 찢어놓은 하늘 사이로
그의 몸이 비틀리듯 흔들렸다.
태풍은 밤새 우리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의 가지엔 상처가 남았고,
내 결엔 검은 흠이 스며들었다.
우리는 서로를 지켰지만,
무언가는 달라졌다.
사랑은 상처를 품은 채
조용히 다음 계절을 기다렸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은 낮아지고 바람은 차가워졌다.
푸르던 내 결은 점차 옅어지고,
그의 눈빛은 먼 곳을 향했다.
나는 여전히 그를 감싸 안고 있었지만,
그는 더 이상 나를 보지 않았다.
나는 남고 싶었고,
그는 이미 마음을 돌리고 있었다.
바람은 그 사이를 지나가며
아무것도 붙들지 않았다.
나는 알았다.
떠남은 외면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빛이 사라지면 온기도 잃는다.
하얀 비가 내리던 날,
나는 마지막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침묵 속에 있었다.
붙들지도, 외면하지도 않은 채
그저 먼 곳의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떨어지기 전, 나는 잠시 그의 그림자를 스쳤다.
그 한순간이,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이 되었다.
내 결이 약해지고,
몸이 바람에 닿자 흔들렸다.
나는 조용히 떨어졌다.
바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부드럽게 품었다.
땅에 닿는 순간,
나는 작은 소리를 냈다.
그것은 울음이 아니었다.
감사의 잔향이었다.
눈비가 내려 시야는 흐려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아주 먼 곳에서,
새로운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 속에는
아주 작은 푸른빛 하나가 깃들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