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한복판이었다.
대학 신방과 동아리에서 해마다 떠나던 농활 체험.
버스가 좁은 언덕길을 넘자 산 아래 마을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논은 햇빛에 번들거렸고, 바람에 벼가 한 방향으로 쓰러지듯 누웠다.
창문 틈으로 흙냄새와 풀냄새가 스며들었다.
아침이면 모두 카메라를 들고 밭으로 들어갔다.
누군가는 사진을 찍고,
누군가는 인터뷰 대신 농사일을 도우며 마을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나는 엉겁결에 호미를 잡고 흙을 뒤집었다.
서툰 손놀림에 겉흙만 긁히기 일쑤였고,
손바닥은 금세 땀에 젖었다.
햇볕은 뺨을 매섭게 때렸고, 신발은 진흙에 박혔다.
“야, 이거 왜 우리가 해야 되냐? 내 전공도 아닌데.”
내가 툭 내뱉자 친구들이 웃었다.
옆에 있던 후배가 고개를 들어 말했다.
“선배는 맨날 투덜대요. 그래도 끝까지 하잖아요.”
나는 무심한 척했지만 괜히 호미질에 힘을 더 줬다.
그녀의 이마엔 땀이 맺혔고, 눈웃음은 햇빛보다 환했다.
호감이 드니 더 투덜거리고 짓궂게 굴고 싶어졌다.
점심 무렵, 마을회관 앞에 긴 식탁이 놓였다.
커다란 솥에서 막 건져낸 된장찌개와 양푼 비빔밥이 줄지어 올랐다.
고추장이 옷에 묻어도 개의치 않았다.
양은 숟가락 부딪히는 소리, 웃음소리, 수박씨 튀는 소리가 한데 섞였다.
후배가 씨를 뱉으며 자랑했다.
“봐요, 제일 멀리 갔죠?”
나는 건성으로 말했다.
“에이, 그 정도는 애들 장난이지.”
그녀는 잠시 입술을 삐죽였다가 금세 웃으며 말했다.
“선배는 진짜 인정이 없네. 그래도 방금 웃은 거 다 봤어요.”
말끝의 장난에 내가 먼저 웃음을 터뜨렸다.
오후에는 마을 청년들과 축구를 했다.
몸은 이미 지쳐 있었는데 나는 또 투덜거렸다.
“일도 힘든데, 또 뛰라고? 이게 무슨 휴식이냐.”
그때 뒤쪽에서 후배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힘내요!”
나는 못 들은 척 공을 세게 찼다.
땀이 눈으로 흘러내리자 순간 짜증이 올라왔다.
“그럼 네가 뛰어주든가?”
후배는 잠깐 고개를 떨구더니, 금세 씩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옆에서 더 크게 응원할게요.”
말은 가벼웠지만, 그 미세한 표정이 오래 남았다.
작은 말에도 상처를 받는 아이 같아 괜히 미안함이 스쳤다.
하루를 끝내고 돌아가는 길,
어르신이 대문 앞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건넸다.
녹아내리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며
서로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땀에 젖고 흙이 묻은 얼굴이었지만,
그 웃음은 오래 남았다.
밤이면 시골집 마당에 둥글게 앉았다.
별빛이 쏟아질 듯 검은 하늘이 반짝였다.
기타 소리에 맞춰 다 함께 노래를 불렀다.
후배가 내 옆에 와 툭 앉았다.
“선배, 오늘 못한 만큼 내일 더 해야겠죠?”
나는 피곤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게, 내가 축구하지 말자니까. 괜히 뛰었잖아.”
그 말을 듣자 후배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 표정을 보고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그녀도 금세 따라 웃었다.
그때 친구 하나가 기타 줄을 멈추며 장난스럽게 외쳤다.
“거기! 방금 떠들었으니까 노래 불러!”
모두의 시선이 내게 쏠렸다.
“야, 왜 나야!”
나는 손을 내저으며 웃었다.
주변에서 웃음소리가 터졌다.
그 순간, 밤하늘이 환해졌다.
별빛이 무수히 깔린 사이로 유성 하나가 스쳐 지나갔다.
누군가 “소원 빌어!” 하고 외쳤지만,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빛을 오래 바라봤다.
바람이 스치고,
기타 줄이 미세하게 울렸다.
그 소리가 별빛과 섞여
여름밤의 공기 속으로 번져갔다.
── 그리고 몇 해가 흘렀다.
각자 바쁘게 살며 그 여름은 희미해졌다.
그러다 누군가 옛 사진을 단체방에 올리며 말했다.
“오랜만에 모이자.”
그 말에 몇 명이 모였다.
술집 구석에 앉아 추억을 꺼냈다.
“야, 너 그때 호미질도 제대로 못 해서 손 다 까졌잖아.”
“맞다. 내가 대신해 줬지.”
웃음이 번졌다.
사진 속에는 해 질 무렵 들판에 선 우리 모습이 담겨 있었다.
흐릿한 사진인데도 흙냄새와 웃음소리가 동시에 피어올랐다.
나는 술잔을 내려놓고 화면을 오래 바라봤다.
손끝이 다시 거칠어지는 듯,
여름밤 별빛이 눈앞에 번지는 듯,
농활의 기억이 고요히 밀려왔다.
그때, 문이 열렸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익숙한 목소리.
뒤돌아보니 그 후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순간, 술집 안의 소음이 멀어지고
별빛과 흙냄새, 웃음소리가 겹쳐졌다.
그녀는 여전히 붙임성 있게 사람들과 반갑게 인사했다.
그러다 내 쪽을 보자 잠깐 멈칫했다.
미소는 여전했지만 눈빛이 흔들렸다.
예전처럼 내가 무심한 말을 던질까 봐
작은 불안이 스친 듯했다.
그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예전처럼 웃을까 말까 하는 눈빛을 띄웠다.
나는 말없이 술잔을 만지작거렸다.
무뚝뚝한 얼굴이었지만
입가에 번지는 웃음은 감추지 못했다.
그제야 그녀도 안도한 듯 작게 웃었다.
그 미소는 예전보다 조금 성숙해 보였지만,
마음속에서 번지는 빛은 여전히 그 여름과 같았다.
오래전 하지 못한 말들이
다시 별빛처럼 가슴속에서 깜빡였다.
그날의 여름은,
아직 내 안에서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