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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아 Aug 29. 2020

숨기고 싶지 않았던, 숨기고 싶은 마음

지난 글에, "이 여름을 앓더라고 천천히 하나씩 고쳐나가자"고 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고치지 못했다. 나는 또다시 8월을 심하게 앓았다. 아무와도 연결되고 싶지 않아 오는 연락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는 그 모습이 건성으로 대하는 것처럼 보일까봐, 답장을 하지 못했다. 다행히 코로나는 좋은 핑계가 되어주었다. 회사에서도 아는 사람과 대화할 일보다 익명의 누군가와 대화할 일이 많아서 버틸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 돌아오는 1:1 시간이 가장 힘들었고, 외부 클라이언트와 이야기할 때 가장 편안했다. 들키고 싶지 않은 마음을 안 내보여도 되니까. 주어진 주제에 대해서 가장 효율적으로 '미팅'을 끝내면 되는 것이었으니까.


지난 5월 이후, 매일 일기를 쓰던 것도 8월엔 더뎠다. 같은 일상을 반복하다보니 스스로가 지루해진 게 분명했다. 얼마 전 뽈이 "요즘 가장 기대되는 일이 뭐야?"라고 물었는데 "<MenMenSuel*>을 만드는 일"이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거짓말, 아니 거짓말 아니야. 이게 제일 재밌고 기대돼. 다른 건 잘 모르겠어. "그럼 가장 두려운 일은 뭐야?" 너무 많은데. 내가 나를 지켜내지 못할까봐 두려워. 라고 답했더니 우리 앞으로 내야 할 책이 많아서 당분간은 힘내야 한다고 했다. 그래 야림의 <대학원일기>도, 뽈의 <이 편지는 영국으로부터 시작되어...>고 <CHALKAK>도, 나와 동그라미의 <크고 작은 하루>도, 그리고 문어들의 <코로나 시대 생존일기>도 다 내야지. 우리가 밤마다 때론 즐거워하면서, 때론 고통스러워하면서 쪄낸 글이니까.


여튼, 그리하여 내가 8월 동안 쓴 일기 일부 발췌


 8월 13일

여느날과 다름없는, 아니 평소보다 훨씬 정신 없는 하루였는데 쵸가 말차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다도를 좋아한다더니 과연, 영화 <일일시호일>에서나 봤던 다기 세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말챠 가루를 곱게 물에 개어 우유에 타는 5분의 시간 동안 의도적으로 호흡을 가라앉혔다. 거짓말처럼 머리 아프던 게 싹 사라졌다. 이런 힘이 있는 사람이구나, 오늘도 쵸에 대해 하나 알았다.  다음 월급을 타면 나도 다기를 사볼까. 맥주를 줄이고 차를 마시면 어떠려나. (월급은 받았고 아직은 사지 못했다. 돈을 아껴야 하거든요)


 8월 15일 

<서울이십> 2호를 전달하기 위해 뽈동그라미인주채경과 함께 악어에서 밥을 먹다 문득, 행복이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소담하게 이야기 나누며 서로의 근황을 묻는 일. 이것만으로도 살아갈 이유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8월 21일

다음주 토-일에 열릴 예정이던 <잡지의 가치> 북페어가 연기되었다. 이후 커넥티드 서점이 오픈하는 스몰마켓도 연기되었다. 자꾸만 북페어가 취소되거나 온라인으로 바뀐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맥이 풀린다. <서울이십>은 평가받을 기회조차 잃고 있다. 29일인 오늘, 서울이십의 리뉴얼 작업에 들어갔다. 우리끼리도 고쳐야 할 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말로 시장에서 팔리지 않을 작업이었을까? 난 이 작업 하는 게 괴롭지만 좋은데. 이 여름만 지나가면 잘 할 수 있는 작업인데.


 8월 22일

멍멍슈엘을 읽고 있으면, 글은 이런 사람이 쓰는 거지, 싶다. 읽으면서

언어를 배운다는 건 어떤 건지 궁금해졌고

프랑스어를 배우고 싶어졌따.

나를 위한 밥상을 잘 차려주고 싶어졌다.

가끔 뽈이 영국으로 돌아간 뒤의 집을 상상해본다. 어느새 그가 집에 머문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고, 그의 짐이 있던 방이 휑할 것이다. 냉장고는 넘치는데 식탁은 비어갈지도. 코로나 시대여서 더 그런가, 자주 뽈과 저녁먹고 영화를 보면서 저녁 시간을 보냈는데 그가 돌아간 뒤의 저녁은 조금 쓸쓸할 것 같다. 




8월의 사진들

마음수련을 위해 목공을 배우고, 노트제작을 하는 중이다




여담으로 요즘 프랑스 거주자 됴디님의 <MenMenSuel(멍멍슈엘)>을 출판하는 데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 코로나 때문에 도시 전체가 봉쇄된 후, 매일을 기록한 일종의 '다섯 달 간의 파리 감금 일기'인데 4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임에도 푹 빠져 금세 읽었다. 미용실 가서도 세 시간 내내 이것만 쳐다보고 있었더니 금세 매직펌이 끝나더라니까. 다음주 즈음엔 텀블벅을 오픈할 수 있을 듯 하고, 아마 내가 아니더라도 다른 문어 친구들이 텀블벅 페이지를 링크해줄 테니 나는 예고편만 슬쩍 내보이겠다. 아, 참고로 MenMenSuel의 한국어판 이름은 '개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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