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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뽈입니다 Sep 07. 2020

쏜살

2020년 09월 06일 일요일

날씨 : 맑음

기록자 : 뽈




# 8월이 사라졌다. 정말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란 말밖에는 표현할 방도가 없을 정도로 쏜살같이.


# 삼십 년 내내 어찌어찌 꾹꾹 묻어 지켜온 묵은 감정들이 예기치 않은 계기로 범람해 버렸다. 대범람 앞에서 마구 쏟아지고 흘러 흩어지는 것들을 막아설 도리도 없고 더는 그러고 싶지도 않아서 내버려 뒀다. 자, 여태 생장 중이라고 생각하셨죠? 나름 비옥하게 갈아진 땅인 줄로 아셨을 테지만 사실 이곳은 처음부터 툰드라였답니다. 어찌나 황폐하게 얼어붙었는지 순록 한 마리 찾아온 적 없는 땅이지요. 그러니 이제 그만. 착각과 환상을 거두고 현실을 직시하세요. 그만 헤집어 주세요. 라고 제대로 말하고 싶었으나. 또 완벽히 하진 못했지. 툰드라엔 그저 새로운 구멍이 패였을 뿐이다.


# 한국에 온 뒤로도 줄곧 뒹굴댄 게 벌써 3개월. 어디 크게 돈 쓰지 않는데도 땅 깊은 줄 모르고 꺼져만 가던 마이너스 통장 잔고를 보며 한숨도 슬 깊어질 무렵, 기적처럼 일 하나가 주어졌다. 나를 가련히 여긴 가까운 이께서 좋은 제안을 하신 것. 3년 전 회사 다닐 때 하던 유의 프로젝트라 덥석 물어야 하나 싶었는데, 한편으론 쉬이 수락하기가 어렵더라고. 런던에서 언제 부를지 몰라 상비군처럼 대기해야 하는 처지인데 이 일을 덥석 물어 진행하다 혹여라도 중간에 일정과 계획이 틀어지면, 이도 저도 다 망치는 꼴이 돼버리는 건 아닌가. 문어니까 내 얼굴 먹칠하는 거야 상관없는데 내 알량한 능력을 믿고 맡겨준 감사한 이의 얼굴과 중요한 커리어까지 먹칠하게 되는 건 아닌가 싶어서. 아니, 근데 런던에서 당장 안 부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럼 제 손으로 놓쳐놓고 후회할 테지, 젠장.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방에 틀어박힌 내게 문어들이 제 일처럼 생각하며 쏴준 조언과 지지가 없었다면 못 이기는 척 눈 감고 내민 손을 잡을 용기 따위, 끝까지 내지 못했을 거다.



# 연천. 이번 일로 알게 됐지 이전엔 연천이란 도시가 어디 붙어있는지, 아니 애초에 있는지도 몰랐지. 듣고도 강원도인가 충북인가 물었을 정도. 접경 지역. 비무장지대. 두 개의 강줄기를 품은 마을. 질곡의 시간이 굳히고 깎고 다시 굳힌 적벽이 청록빛 강을 따라 길게 늘어진 동네. 북쪽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가장 먼저 머금는 남쪽 땅. 민간인 출입 통제선을 넘나들며 농사짓는 사람들이 사는, 그런 땅.


# 7월 마지막 주부터 8월 넷째 주까지 서너 번에 걸쳐 2박 3일과 1박 2일, 또 당일로 출장을 다니며 연천에 터 잡고 사는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피난 온 이래 대대로 정미소를 하며 전통 나무 활을 만들고 쏘는 사람들. 최남단 섬에서 태어나 내륙의 최북단으로 올라와 살게 된 사람. 호젓한 산중에 묻혀 수십 년째 그릇을 굽는 사람. 농사일이라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는 도시인으로 살다가 이제는 단호박이며 콩을 길러 먹고 신토불이의 소중함을 설파하게 된 사람들까지. 참으로 오랜만에 이 일을 하며 새삼 깨단한 게 있다면, 땅이든 인간이든 다른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이면서도 실은 정말 대단히 다르다는 것. 같은 세월을 통과하고도 우리는 각자만의 방식으로 저마다의 음각을 새긴다. 멀리서 보면 모두 비슷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어느 하나 같지 않은 지문처럼. 참 신박한 행성이고 참 신박한 존재들이다.


# 당치 않은 재주를 긁어모아 주어진 기한 안에 쓰려니 마감 즈음엔 꿈쩍하질 못했다. 엉덩이를 바닥에 착 붙이고 앉아서 만두 찜기처럼 쉬지 않고 원고를 쪄냈다. 모양이야 엉망일지라도 소는 좀 괜찮은 맛이어야 할 텐데. 기름기 적고 담백한 소는 어떻게 만드는 걸까. 계속 이렇게 무언가 써야 하는 운명이라면 그런 글을 쓰고 싶은데 이렇게 늘 구구절절해서야. 운명은 개뿔, 이번 생은 틀린 모양. 글보단 참치김치찌개를 만들어 팔아먹고 사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르는 생이다. 아무튼 어떤 면으로는 괴로웠으나 간만에 흥미로운 때를 보냈다. 종잡을 수 없는 마음에도 잠시 브레이크를 걸 수 있는 시간이었고.


올해의 호수는 고성 송지호. 송지효 아님 주의


# 일을 끝냈더니 8월이 열흘 남아있었다. 그 열흘간 뭘 했지. 정리와 인사로 다 보낸 것 같은데. 아니지. 정리는 무슨. 그냥 남겨두고 왔지. 아니, 그것도 아니고 받아온 게 많기만 하지, 뭐.


한양 도성 성곽 최고 맛집
서계동 쑤쿰빗에서 받은 황송한 접대
그리고 나는 집주인이 가끔 차려준 밥을 좋아했던 것 같다


# 넉 달 동안 나를 기껍게 여겨 먹이고 재우고 보살핀 이들에게 이번에 진 빚은 또 언제 갚을 수 있을까. 여태 살며 진 빚만으로도 이미 회생 불가인데. 빚지는 걸 싫어한다고 지껄이기만 하지 허장성세다. 매일 빚을 지며 살지. 갚을 능력도 없으면서. 갚는 일은 능력보다도 의지가 필요한 걸까. 그런데 의지도 능력이잖아. 하여간 무능력.


# 어쩌면 진심으로 고맙단 말 한마디면 될 것을. 하여간 인간이 덜됐다, 아주.


그리울 응암동 골목


봄의 한가운데에 왔고 여름의 끝자락에 떠난다.

바랐던 대로 나는 가을에도 살아있고, 그래서 생존기도 현재진행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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