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en the day comes, 그 날이 오면
요새 통 영화를 못 보다가 CJE&M 영화홍보팀에서 일하는 친구 덕분에 12월의 마지막에 1987을 보게 되었다. 이한열 기념 사업회 페이스북 소식을 통해 이 영화를 찍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지만, 대대적인 홍보도 없었던 걸 보면 서슬 퍼런 시절 얼마나 조용히 영화를 진행해왔는지 짐작이 갔다.
사실 그 어떤 장면보다 치였던 지점은, 고창석이 언론보도지침을 지울 때 동아일보 기자들이 환호하며 숨통이 트였다는 표정을 짓던 장면. 언론고시를 준비했어서인지, 아니면 지금 저널리즘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이야기하는 회사에 다녀서인지, 지금의 상황이 오버랩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건 팩트잖아요."라고 외치며 진실을 알리기 위해 다니던 기자들, 우리는 그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우리는 그 모습을 2016년, 엿보았던 걸까.
아직도 치앙마이 여행에서 탄핵재판을 보며 환호했던 기억이 선명하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여행 중에 그 탄핵재판을 보겠다고 아침을 먹으면서도 핸드폰에 코 박고 있었고 어디 가지도 않은 채 숙소에 앉아서 그 재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그 날 내가 한국에 없다는 사실이 그렇게나 아쉬울 수가 없었다. 나는 한국인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의 경계선에 있는 그 숙소에서 혼자 소리를 지르며 기쁨에 겨워했다.
1987년의 사람들도 그랬을까.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고, 아니 죽으면 다행이지 어디론가 끌려가 계속해서 고통을 당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자유를 향한 갈망은 멈출 수 없었던 것일까. 그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봄이 찾아왔을 때 그때의 사람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짐작도 되지 않는다. 기쁨, 슬픔, 마침내, 조금만 더, 사랑하는 우리 아들, 네가 살아있었으면...
영화를 보면서 내가 부르고 다닌 수많은 민중가요가 너무 부끄러워졌다. 나는 도대체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노수석 열사와 이한열 열사의 추모제에서 노래를 불렀던가. 왜 매년 돌아오는 의례적인 행사라고 생각했던가. 술에 추해서도 부르던 투쟁가들을 어느 순간부터 함부로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은 그 노래가 가진 무게와 그 노래를 위해 흘린 피를 알지 못하는 내가 부끄러워서였다. 많은 사람들이 그날은 오지 않을 거라고 했지만, 결국 그날은 왔다. 우리는 지금의 봄을 온 힘을 다해 지켜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