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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유

「00야. 죄많은. 엄마다용서마지마라 어찌 어찌 너에 버호를 알게되어군아. 내가 너무도 불쌍해보여는 죽기전에목소리라두들으라고. 잘지내거라 내새끼 (중략) 건강하게잘지내거라. 내생명. 내삶의 전부인 내아들 너만생각함. 죄스럽군아 미안하다. 속죄하마. 내 생면 내아들 부디 행복하거라. 못난엄마 ***」

크리스마스 사흘 전. 현관문에 등기 우편물 도착 안내서가 붙어있었다. 그 사람이었다. 집배원에게 전화해 반송을 부탁했다. 다음날 자신을 엄마라 칭하는 문자메시지가 왔다. 내가 그의 삶의 전부라 말하지만, 아직도 자신이 세상에 전부인 사람. 피아제의 인지발달 이론 중 전조작기 2~7세 아이들이 보이는 자기중심적 사고가 떠올랐다. 내가 배가 고프면 세상도 배고프고, 내가 속상하면 세상도 속상하다고 생각하는 독백언어. 자신 이외의 다른 사람의 생각에 이해, 인정, 공감하지 못하는 상태. 10년 전과 단 하나도 바뀌지 않은 자기중심적 메시지를 보자 소름이 돋았다.


야간 조 출근하는 아침이었다. 새벽에 퇴근 후에 가을학기 기말고사 시험 준비와 리포트 제출로 인해 동이 틀 때까지 공부했다. 출근까지 알람을 최대한 늦추고 블라인드를 내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연락이 올 곳이 없는데 미간을 찡그려 실눈을 뜨고 휴대전화로 손을 뻗었다. 광고 전화로 생각하고 수신 거부하려는 찰나 익숙한 번호 062-370-XXXX. 순간 동공이 커졌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벌떡 일어나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인사팀 □□□ 대리입니다. 000씨 되시나요?” 회사에 엄마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내 연락처를 알려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대상에게 허리를 굽혀 미안하다고 사과한 후 전화를 끊었다. 피로와 가을학기 기말고사 스트레스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잊고 있었던 그의 존재를 떠올려서 그런 걸까? 빈속이었는데 메스꺼움이 올라와 변기를 붙잡고 구역질했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 외할아버지, 할머니의 임종이 다가왔을까?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었다. 돈 때문이란 확신이 들었다. 주변 사람들을 들들 볶고 더 이상 돈 나올 구멍이 없으니 찾은 최후의 보루. 손가락 하나로 인생 편하게 사는 그의 행동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스물다섯 살 때도 그랬다. 그의 빛 1억 4천을 갚아준 날. 더 이상 돈을 달라고 하지 않는다. 각서를 쓰고 헤어졌다. 그리고 6개월도 지나지 않았다. 뉴스에서 나오는 회사 성과급 잔치. 손가락으로 딸깍 전화를 걸어 돈 빌려 달라고 말했다.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올 때의 마음이 다른 것처럼. 자신이 어떤 말과 행동을 했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그가 엄마의 삶을 포기하고 여자의 인생을 선택했듯, 나도 자식의 삶을 포기하고 내 인생을 살아가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더 글로리 주인공 문동은(송혜교)은 엄마 정미희(박지아)를 피하고자 살지 않는 원룸에 전입신고를 하고 유령처럼 살아간다. 나도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전셋집 보증금을 지키기 위한 확정일자를 포기할 수 없었다. 엄마는 화가 나면 입버릇처럼 “호적에서 파버린다.”라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가족관계에서 나가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태어나면서 부모가 뒤바뀐 게 아니라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서류상으로 가족이었다. 결국 그가 내 집 주소를 아는 건 등본 하나면 충분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엄마의 오입질을 마주하며 가슴에 묻었다. 지금 움직이는 건 껍데기만 남은 고깃덩어리에 불과한 사람이니까. 내 전화번호를 바꾸고 SNS와 엄마 번호를 차단했다. 하지만 혈연관계는 끊을 수 없었다.


스물여섯 살 엄마를 독립시키고, 서른다섯 살 아빠를 독립시켰다. 데미안에서 나오는 아브락사스로 날아가려 힘껏 날갯짓할 때였다. 떼어낸 혹이 다시 굴러와 내 발목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손가락 하나 딸깍해서 주소를 알아내 등기우편과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그를 그리워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과거에 내 자아를 무너뜨리기 위해서 수없이 행했던 행동과 표정 폭언. 그 모든 것은 아직도 상처로 곪아 썩어가고 있는데, 그는 무엇을 어떻게 기억하고 있는 것일까?

「이해도 용서도 바라지도 않아 내가 뭘 이리 잘있는 것으로 되었다 늘그래듯이. 너가내게 예쁜짖 7살때까지 다해줘다 정말행복하게 해주어짖. 고맙다」

두 번째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순간 무드셀라 증후군[Methuselah syndrome]이 떠올랐다. 나이가 들수록 사람은 과거를 떠올리며 ‘그때가 참 좋았지’라며 그 시절을 그리워한다. 추억을 아름답게 포장하고, 나쁜 기억을 지우고 좋은 것만 남기려는 행동. 이것은 일종의 도피심리다. 찬란하게 빛났던 과거에 비해 현재가 너무 볼품없게 느껴지기 때문에 기억을 왜곡한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 속 과거를 동경하며 현재의 삶은 암울하고 무의미하게 느끼면서. 당시에 내가 받은 감정에 대해서는 하나도 모르면서 과거를 언급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아르바이트하면서 나의 문제점을 마주하게 되었다. 큰 그림은 잘 보면서 세세한 것을 보지 못했다. 가벼운 일은 빠르게 처리해야 하는 데 신중하게 오랜 시간을 소비했다. 당시에는 내가 못나고 부족해서라고 자책했다. 그런데 상담심리를 공부하며 알게 되었다. 왜 큰 그림을 잘 보고 세세한 것은 보지 못했는지. 문제를 받으면 꼼꼼하게 생각해서 최적의 판단을 내렸지만, 빠른 의사결정을 못 한 이유를 깨달았다. 상호 존중이 없는 애정의 일방통행. 부모의 비일관적인 양육 태도로 인해 눈치를 살펴야 했다. 같은 결과라도 그의 기분이 좋을 때는 칭찬 받지만 나쁠 때는 꾸중을 들을 테니까. 나의 생활도 그렇게 바뀌었다. 엄마가 정말 밉지만, 그의 사랑을 갈구하는 양가감정이 들 때 혼란스러웠다. 그와 가까이하면 가시에 찔려 피가 나서 떨어져야 하는데, 온기와 체취가 좋아서 다가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처해있는 상황이나 환경에 예민하게 의존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발달했다. 나에게 주어진 문제에 즉각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 천천히 뜯어보고 문제를 깊이 있게 생각하고 해결해야 했다. 효율성과 체계성과는 거리가 멀어졌다. 문제를 받으면 여러 번 고찰하고 해결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고민했다. 고차원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쉽고 즉각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안. 눈에 보이는 대로 해결해야 할 것들을 빨리 결정하지 못해 수없이 좌절했다. 그 결과 큰 그림을 잘 봤지만, 그 속에 세세한 것들은 그냥 지나쳐갔다. 타인의 감정을 읽기 위해 노력했지 정작 나의 기분은 생각하지 못했다. 내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고 숨기고 치환하기 급급했다. 어느 순간 슬퍼도 웃고, 아파도 웃고, 힘들어도 웃는 감정 불감증이 생겼다.

그의 문자메시지를 받은 크리스마스이브 기분이 좋지 못했다. 25일은 정말 알차게 보내고 싶었다. 새벽부터 일어나 집 정리하고 청소와 이불 빨래까지 돌려 널었다. 전시전을 관람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엄마야. 잘 지내니? 엄마 이제 죽으려고 해.” “나는 잘살고 있으니까 알아서 하세요.” 자살 예고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안겨주는 사람. 하지만 죽을 것 같지 않았다. 몇 달 전까지 나는 정말 죽을 각오를 했다. 이 감정이 오염될까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선택한 죽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그런데 그는 한 달 동안 전화로, 등기로 문자메시지로 음성통화로 떠들었다. 과연 그의 생에 마지막 안부였을까?


‘그렇게 살 거면 후회하지 말고, 후회할 거면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지.’ 나는 당신이 죽을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문자메시지에 답장이 없자, 차단한 번호 외에 다른 휴대전화기로 전화한 사람. 당신은 오래전부터 가진 돈 다 쓰고 죽을 거라 떠들었으니까. 누구보다 이승에 남아있고 싶어 하니까. 생의 마지막을 걸고 자식에게 블러핑을 하는 사람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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