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8월의 어느 날 , 밤늦은 시간임에도 아홉 살 소녀는 원고지 첫 장을 여전히 넘기지 못하고 있다.
원고지 좌측 상단에 <<독후감>>이라고 적는다. 한 줄을 비우고 그 다음 줄에 책 제목을 적는다. 그 밑에 학교명, 학년 반, 이름을 오른쪽 칸부터 글자수를 세어 거꾸로 적기 시작한다. 그러면 아래에 서너 줄 정도가 남는다. 그 서너줄을 채워줄 두 문장이 생각나지 않는다. 사실은 독후감을 어떻게 쓰는지 전혀 모른다고 하는 게 어울린다. 벌써 두 어시간이 흘렀다. 날이 밝아 해가뜨면 학교로 가야한다.
맥심 커피병 겉면을 지점토로 덮은 뒤 얇고 길게 만든 두 줄의 지점토를 꽈배기 모양으로 만들어 병 입구에 얹는다. 지점토가 마르면 수채화 물감으로 색을 입히고 다시 생각해도 두통을 유발하는 니스칠을 한 뒤 완전히 말려 완성된 꽃병.
집에서 가까이 사는 죄로 사촌오빠가 대신 만들어 준 고무 동력기.
방학 때 어디로 피서 갔다 왔는지 단번에 알 수 있을 8절 도화지에 크레파스로 채색한 그림
며칠씩 밀려서 쓰느라 날짜와 날씨가 전혀 맞지 않지만 나만 그런 건 아닐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을 가진채 담임교사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바라며 부랴부랴 완성한 일기.
그럭저럭 남들이 하는 방학숙제 구색은 갖춘 것 같다. 다만 밤 9시가 넘도록 한 걸음도 진도를 못 나가는 독후감은 어찌할 방도가 없다. 이러다 잠도 못 잘 것 같다는 두려움,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 몇명을 대상으로 화풀이 하듯 뺨과 정강이를 쉴 새 없이 후려갈기며 악마가 사람 탈을 쓴 듯 체벌로 하루를 열고 닫던 담임선생(님이라는 단어를 붙여줄 수가 없다.)이 떠오르자 소녀는 눈물이 왈칵 터졌다. 이제 와서 후회한다고 바뀔 것은 없다. 세상이란 이렇게도 냉혹한 것이다.
아니, 독후감은 똑똑한 사람만 쓰는 건가?
고학년들만 쓰는 거 아니었냐고..
읽은 책의 내용을 쓰고 감상을 쓰라는데 감상.. 그게 뭔데?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감상이고 느낌이고 간에 일단 원고지 매수라도 얼추 채워야 한다. 늦은 밤이 되니 눈꺼풀은 주체할 수 없이 내려오고 있다.
'꼬마 환경 파수꾼'이라는 학교 선정 도서를 다시 뒤적 거린다. 굉장히 재미있게 읽은 책인데 뭘 써야 할지는 모르겠다. 주인공 이름도 알고 환경보호의 주제를 가진 책인 것도 안다. 하지만 원고지위에 연필을 올리는 순간 모든걸 잊어버리는 묘술이라도 부린걸까? 대체 무얼 쓰라는 건지..
이윽고 책 날개면의 지은이 소개글과 '이 책을 펴내며' 밑에 적힌 인사말도 베끼어 본다. 마지막으로 아무 페이지나 펼쳐 그대로 필사하듯 쭉 옮겨 적는다. 그저 쓰여 있는 것을 베꼈을 뿐인데 지우개와 종이가 일으킨 마찰에 원고지는 이미 지저분해 졌다. 한 번만 더 지우면 곧 찢어질 참이다. 그래도 벌써 다섯 페이지가 넘어간다. 여덟 페이지가 채워지면 바로 잘 생각이다.
그러다 몇 분 전 엉엉 울던 소녀의 울음소리를 들은 엄마는 뒤늦게 방으로 들어온다. 이내 원고지를 휙 잡아채고 읽는다. 몇 초쯤 흘렀을까?
모든 숙제를 끝내고 이불 위에 누워있던 첫째 딸에게 불호령이 떨어졌다.
"재연아, 얘 이거 어떡하니? 네가 쓸 거를 불러주던지 대신 써 주던지 해라. 써놓은 것 좀 봐라.. 아이고.."
"아! 왜 또 나야!!!"
"아고.. 그냥 좀 해줘. 얘 지금 반장인데 어떡하겠니?"
독후감도 쓸 줄 모르는 반장이라니 다시 생각해도 참 부끄럽다. 사실 그때의 반장이란 한 이십 명쯤 손을 들어 출마 의사를 밝힌 뒤 두세 명씩 표를 나눠가진 것이나 다름없는 경쟁률. 결과적으로 운 좋게 두 명 정도 더 표를 얻어 아주 간소한 차로 뽑힌 반장이 바로 나였다. 촌지가 판을 치던 그 시절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던 반장에 덜컥 당선된 나 때문에 우리 엄마는 꽤나 고생했다. 엄마는 정확히 그 해 말에 촌지를 끊음과 동시에 학교 자체에 발길을 끊었고 그 결심은 고3까지 이어졌다. 아마 그 모든 기억을 떠올리는 것조차 지긋지긋 하셨었으리라.
엄마가 방에서 나가고 난 뒤 소녀는 언니의 온갖 화풀이를 감내하며 언니가 불러주는 데로 원고지에 받아 적는다. 소녀는 수 번도 더 읽은 그 책을 언니는 지금 막 속독했음에도(거의 훑어보다시피) 내용과 느낌과 생각을 그 자리에서 정리해 낸다. 심지어 말로 표현해 낼 수가 있다니.. 그 와중에 동생의 띄어쓰기, 맞춤법까지 봐주고 있다는 게.. 소녀는 언니가 정말 무섭지만 천재가 아닌가 잠시 생각했다. 천재니까 화내며 소리쳐도 괜찮다. 사실은 호랑이 같은 언니보다 내일 다시 보게 될 담임이 더 무섭다. 그렇게 언니의 도움으로 처음부터 다시 쓰기 시작한 독후감은 삼십 여분만에 완성할 수 있었다.
보름 정도 후, 담임교사는 소녀의 이름을 호명했고 소녀는 교탁앞으로 나가 상장 한장을 받았다.
위 어린이는 여름방학 과제물 제출 (독후감)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었으므로 이 상을 주어 칭찬합니다.
(부분: 독후감 / 가작상)
장려상, 우수상, 최우수상, 대상, 금상, 은상, 동상 다 들어봤는데.. 가작상은 뭘까?
일단 상장을 받았으니 기분이 좋을법도 한데 소녀는 두 뺨부터 귀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다. 언니가 써준 독후감으로 상을 받았다는 사실이 부끄러웠다. 나만 아는 비밀이지만 곧장 들킬 것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 그나마 일말의 양심인 듯했다.
정말이지 상을 받을 정도로 우수한 구석이 거의 없지만 자식의 부족함을 보완해 줄 수 있는 선택이 촌지라고 여겼던 엄마, 정말 어지간만 했어도 장려상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상을 받는것이 이다지도 부끄럽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담임교사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깔끔하게 정리된 원고뭉치는 소녀의 글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읽자마자 문제삼거나 아예 애써 무시할 수 있었겠지만 여러 차례 받은 촌지의 사례를 안 할 수 없었던 담임은 급한 대로 '가작'을 선택했을 것이다. 아홉 살 소녀는 상의 의미는 몰랐지만 부끄러움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 상장을 받아 든 엄마의 표정이 잊히질 않는다.
중간도 못하는 딸에 대한 원망과 답답함, 안 주느니만 못한 가작상의 부끄러움과 담임의 속마음까지도 느껴버린 엄마의 한숨.
당선작품에 버금가는 수준의 결과물에게 부여하는 가치가 가작이다. 담임교사와 엄마, 소녀는 저마다 받아들이는 깊이는 달랐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가작의 '가'가 '아름다울 가'가 아닌 '거짓 가'였음을.
이후에도 소녀는 감정, 기분, 마음을 글이나 취미, 특기와 같은 건강한 방법들로 표현하지 못했다. 여전히 글을 쓰는 것은 어려웠다. 그런건 타고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일테다. 아홉살에 받은 가작상은 그에게 많은 것을 느끼게 했지만 그 부끄러움은 소녀를 한 걸음 더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기억을 애써 지우고 묻어두려 했다. 그리곤 그저 슬퍼하기 바빴다. 지나치게 아파하며.
건강치 못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많은 이유들이 있었지만 이곳에 일일이 열거하는 일은 제쳐 두겠다. 소녀느 성인이 되어서도 한동안 술에 의지했고 술은 매일같이 눈물샘을 자극했다. 그리곤 한이 맺힌 듯 우는 날이 많았다. 멈추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십수 년 넘게 쌓여온 마음의 응어리들을 단기간에 깨끗이 지워버리기엔 역부족이었다. 그것이 눈물이든 알코올의 힘이든 계속해서 분출시키는 게 차라리 다행한 일이었다. 모든 게 해소되진 않았지만 대차게 울고 나면 순간적으로나마 해소되는 느낌이 들긴했다.
이후에도 습관적으로 술을 마셨다. 그래야만 지쳐 잠이 들고 마음의 응어리를 잊을 수 있었다. 한 오 년쯤 그리 보내고 나니 술을 마시고 대성통곡하는 일은 잦아들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억눌려 살아왔던 시절에의 한이 조금은 걷혔던 시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시기까지 살아왔던 삶은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감성을 키우기보다 감정과 감각만 자극하는 환경이었다. 그 속에서 죽지 않고 버텼으니 그걸로도 충분히 잘 견뎌왔다고 마음은 자라지 못한채 몸만 성장한 그때의 내게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수년이 흘러 종교생활에 의지하며 스스로 마음을 지키는 법을 배우는가 싶었지만 그 안에서 또 다시 다치고 할퀴어진 삶은 서른이 다 되어서야 비로소 소강상태가 되었다. 그렇다고 믿었다. 원하던 회사에 입사했고 짧은 가방끈에도 불구하고 과장 직함도 4년 차에 달게 되면서 스스로 말하길 개천에서 용 난 사람이 되었다. 여전히 마음은 건강치 못했지만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냈다.
그때 간과했던 건 고생 끝엔 낙이 온다고 느끼면 그 낙이 죽을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고 믿은 것이다. 나만 흔들리지 않으면 내가 쌓은 공든 탑은 그 누구도 해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예상은 빗나갔고 해친 자는 타인이 아닌 바로 나 자신이었다.
이십 대에 찾아온 그것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이었다. 방황과 일탈의 문제가 아니었다. 누군가의 배우자, 두 아이의 엄마, 회사에서 중간관리자의 이름으로 산다는 것은 길은 모르지만 이미 수십 번은 그 길을 가본사람과 같은 능숙한 연기가 필요했고 아이들이 나를 보고 배우며 닮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언제나 나를 걱정 속에 살게 했다. 숱한 일을 겪고도 여전히 자라지 못한 마음은 언제나 중요한 상황에서 일을 그르치게 만들었고 스스로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서른 초반이 훌쩍 지나서 다시 찾아온 것 같은 사춘기는 사람을 미치게 만들 정도로 압박했다. 그때 불현듯 인생에서 떠올려 보지 않았던, 그러니까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었던 글 쓰는 사람으로서의 삶을 막연히 생각했다. 유려한 글을 쓰기보다 살기 위해 선택한 생존의 도구였다.
그래도 어떤 계기나 구심점이 있었을 법 한데 정말이지 불현듯 그렇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트레스의 깊이만큼 승진이라는 이름과 맞바꾸었지만 이내 나는 십 년간 근속하던 교계 언론사(행정직)를 퇴사하고 온전히 쓰는 사람으로 살기로 마음먹었다.
글을 쓰며 산다는 일은 참 막연하지만 내겐 운명이었다. 그렇게 불현듯 찾아왔다.
글 쓰며 사는 것이 평생 밥 먹여 주진 않더라도 설사 나를 굶기더라도 글을 쓰면 마음의 병은 치유되지 않을까, 삶을 기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이 될거라 생각했다. 꼬박꼬박 오른 연봉을 포기하면서까지 온전히 마음먹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꼬박 2년 반이 걸렸다. 수입은 그때에 비하면 적지만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은 타고난 능력도 글빨도 필력도 사명도 아니다. 어린 시절부터 온전히 제때에 표현하지 못했던 무수히 많은 감정과 아픔들 이었다. 그것을 문제 삼아 주변에서 늘 채근을 들으며 살아왔지만 그 애증의 감정들이 글을 쓰는 가장 큰 힘이 될 것이라는 걸 그때도 알았다면 좀 더 귀히 대해줄 걸 그랬다.
학창시절에도 그러했듯 나는 다독하며 두루 글을 읽는 사람은 못되었다. 오히려 강박에 사로잡혀 자기계발서만 읽었고 당연히 독서편식은 심했다. 난독증까지는 아니었지만 글을 읽다가도 오만가지 잡념들이 한데 뒤섞였다. 제대로 된 문학공부도 해본 적이 없다.
그럼에도 여전히 4년째 글을 쓴다. 지금 쓰고있는 이 브런치스토리 계정이전에 4년 전부터 써오던 또 다른 계정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약 200여 편의 글을 꾸준히 썼다. 어떤 날은 이른바 데스노트 마냥 감정의 배설이었고, 어떤 날엔 읽을수록 두드러기가 날 것 같은 비아냥거림이 가득한 날도 있었다. 가끔은 성찰과 참회의 글을 써 내려갔고 절절한 편지글 등 유형도 내용도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썼다. 서른여섯부터 서른여덟이 되기까지의 기록을 브런치북 3권으로 엮어냈고 그렇게 삼 심대의 일부를 글로써 기록했다. 그때 쓰던 필명 역시 내게 상처되는 말을 한 이에게 한껏 비아냥대는 듯한 느낌으로 지었다. '안물안궁의 삶'이 그것이다. "네 얘기 하나도 안궁금해"라던 전 직장 언론사 국장을 향해 "너는 안궁금해도 나는 내얘기 평생 궁금해 할거거든!" 이라며 일갈하는 마음으로 지었다. 돌이켜보니 아무리 분노는 또 다른 시작을 하게하는 힘이라지만 그런 이에게 필명씩이나 포함시켜줄 필요는 없었다.
지금 그 계정은 탈퇴하고 이 계정으로 새로 가입했다. 숨고 움츠려들고 이내 잠수하듯 스스로 묻혀지내던 과거의 습관이 남긴 여파인지 모른다. 더이상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을 삼 개월 후에 맞이하게 된다. 여전히 변덕은 죽을듯 하고 유혹에 갈대마냥 흔들리고 감정의 변화는 밥 먹듯이 겪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안다. 2022년 5월 처음 브린체 스토리에 직접 쓴 글 세편과 앞으로 어떤 글을 쓰며 하나뿐인 내 마음줄 붙잡고 정리하며 살아가겠노라고 진솔하게 적어낸 계획서가 브런치 스토리의 어느 실무자에 눈에 읽히고 곧이어 '작가선정'이 결과를 메일로 통보 받게 되던 날. 마치 문단에 등단한 것 보다 더 큰 기쁨과 환희를 경험했다는 것을. 나보다 소중한 두 아이가 놀이터에서 노는 모습을 지켜보며 흐뭇해하는 뭇 엄마와는 달리 웃지못했던 나는 브런치 스토리의 메일을 받고 나서야 미소지을 수 있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후 에도 나와 같은 꿈을 꾸는 이들과 함께 단편소설집 '길 위에서'를 출판했고 마음의 정원이란 작품을 수록했다. 지금은 초중학생들에게 독서논술을 지도하고 있다.
이 땅에는 온전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해 써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쓰는 사람으로 살아야만 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길을 걸으며 유명해지고 싶지 않다. 생각해 본 적도 없다. 그저 지금처럼 조용히 살아가고 싶다. 만 3년 4개월의 시간 동안 아마추어 작가로 처음 선정에의 기쁨을 선사해 준 브런치 스토리를 통해 진정한 쓰는 사람으로 살아가는 길에 첫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분출, 발산이 아닌 은은한 향기를 자아내듯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늘 눈치 보며 가슴종리며 살아왔던 내게 비루한 글일지라도 마음 가득 응원해 주고 격려해 주고 공감을 표해준 브런치 스토리 독자님들께도 감사함을 전하고 싶다.
내 인생의 1/8은 작가로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여든 살까지 계속해서 쓰는 사람으로, 어디서 무얼 하며 살든 여전히 쓰고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것이다.
언니가 불러준 대로 받아적은 독후감으로 부끄러운 가작상을 받은 아홉살의 소녀는 그렇게 여든이 될 때까지 쓰는 사람으로 살았다
-2065년 9월 어느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