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호가 나타났다!

비가 지나간 자리

by kami

토요일 오후, 비가 막 지나간 뒤 다 같이 쇼핑몰로 향하는 길이었다. 도로는 아직 젖어 있고

신호는 느릿하게 바뀌는데 그때 하늘에 백호가 앉아 있었다.


머리를 세우고 앞발을 모은 채 도시를 내려다보는 자세.

금방 흩어질 걸 알면서도 지금은 분명히 ‘있는’ 형상.


전깃줄은 하늘을 가르고 차들은 묵묵히 앞으로 밀려가는데 호랑이는 아무 말이 없다. 급하지도, 위협적이지도 않다.


그저 잠시 여기에 머문다. 자카르타의 하늘은 늘 그렇다. 믿어도 되고 지나쳐도 되는 것들.

그래도 나는 마음속으로 조심스럽게

줄무늬를 그어본다.


사라지기 전까지는 호랑이로 남겨두고 싶어서.

비 뒤의 하늘에 백호가 나타났고

우리는 그 아래를

아무 일도 없다는 얼굴로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