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문학 리뷰 | 은서란, 《친구를 입양했습니다》
나는 올해로 만 24세, 세는 나이론 스물다섯 살이다. 빠른 연생이라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간 탓에 친구들은 대부분 세는 나이 스물여섯이다. 곧 다가올 2024년 나는 (세는 나이로) 스물여섯이 되고, 친구들은 스물일곱이 될 것이다. 학창 시절 같은 교복을 입고 한 교실에서 별 헛짓거리를 해대며 꺄르르 웃던 우리가 어느새 20대 후반이다. 다들 어느 면은 변했고 어느 면은 변하지 않았다. 우리는 여전히 헛소리를 하며 웃음을 터뜨리지만, 슬슬 책임져야 할 것들이 많아져 얼굴들이 꼭 밝지만은 않다.
20대 초반만 해도 친구들 사이에서 가장 뜨거운 화두는 연애였다. 청소년 시절엔 대학 가야 한다는 어른들 어깃장에 꿈도 못 꾸던 행위가 설레고 신기하고 재밌었다. 친구가 애인과 싸운 때면 그와 헤어져야 하느냐 마느냐를 두고 열심히 토론했다. 꼭 내가 누구와 만나지 않아도 친구들 이야기만 들어도 시간이 훌쩍 지나갔더랬다.
요즘엔 친구들을 만나면 제법 사회인 태가 난다. 약간은 찌들어 있다는 뜻이다. 한 사람과 오래 연애한 친구들이 많아서 간질간질한 이야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누구 연애하는 사람이 있는지보단 이런 걸 묻는다.
“우리 중에 누가 제일 먼저 결혼할까?”
초혼 연령이 늦어졌다고 한다. 여성가족부 발표에 따르면 평균 초혼 연령이 남자 33.7세, 여자 31.3세라고. 그래도 주변엔 20대 후반의 나이에 결혼하는 여성이 꽤 많다. 올해 들어 유독 친구들과 결혼 얘길 하는 건 그래서다. 우리는 이제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것이다.
사실 결혼 적령기란 말은 좀 우스운 구석이 있다.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이 결혼 적령기라면 스물한 살이나 예순두 살은 결혼 비적령기란 말인가? 나는 그저 하라는 대로 살아왔을 뿐이다.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래서 다녔고, 너도나도 대학 가기에 대학에 입학했다. 입학했으니 졸업해야 할 것 같아서 졸업했고, 졸업하니까 취직해야 할 것 같아서 일을 시작했다. 지금은 모종의 이유로 쉬는 중이지만 어쨌든 대체로 사회가 정해준 길을 걸어왔다. 일단 태어나기만 하면 스케줄이 정해진다니, 편리하기 이루 말할 데가 없다.
그렇게 대학 졸업하고 갓 취업할 나이가 되니 이제는 결혼을 하라는 계시가 내려왔다. 과연 누가 그런 계시를 내릴 권리를 가질 수 있는 건지 호기심마저 인다. 세상에 그런 전지전능한 존재가 있다니. 나는 딱히 신을 믿지 않지만 이쯤 되면 신을 믿어야 할 것도 같다.
내 친구들도 대체로 나와 비슷하게 삶을 꾸려왔다. ‘결혼 적령기’에 접어든 우리가 결혼 이야기를 시작한 건 어떻게 보면 당연한 일이다. 결혼하지 않는 삶은 조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혼은 청년 세대에게 주어진 가장 보통의 미래다.
그러나 결혼은 내겐 없는 미래다. 내가 아주 엄격한 비혼주의자인 것은 아니다. 나는 살아지는 대로 사는 인생이 좋다. 흘러가듯, 이끄는 대로. 그저 그렇게 흐릿하게 일렁이는 나의 미래에 결혼이 자릴 차지한 적이 없을 뿐이다. 서른 전후로 결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듯, 나는 그냥 결혼하지 않은 내 모습을 더욱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거다. 내게 있어 결혼이란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는 건데 내 삶에선 후자의 가능성이 크다고 점쳤을 뿐이다.
그런데 또 ‘결혼 안 함’이 ‘혼자 삶’이 동치관계는 아니다. 외딴섬에서 살고 싶진 않다. 가족들과 친구들과 종종 교류하며, 어떤 공동체를 이루어 함께하고 싶다. 적당히 느슨하면서 적당히 가까운 관계가 네트워크처럼 쭉 퍼져 형성되어 있는 삶, 그중에 한 자릴 차지하는 게 내가 그리는 이상적인 미래다.
문제는 이런 미래가 너무나 꿈만 같아서, 어떻게 실현될 수 있을지 도저히 감이 안 잡힌다는 것이다. 드라마를 봐도 영화를 봐도 사람들은 죄다 불같은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고, 애를 낳는다. 결혼과 무관한 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통 보여주질 않는다. 지금의 사회에서는 그게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친구를 입양했습니다》는 내가 상상한 미래의 일부분을 세밀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 서울에 내 집을 마련하는 게 삶의 최상위 목적처럼 여겨지곤 한다. 땅값과 집값으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거지에 등수를 매기고, 결국엔 그 등수를 사람에게 낙인찍는다. 남의 인생을 두고 성공했느니 실패했느니 하는 평가를 쉽게들 내뱉는다. 사실은 그게 무례하기 그지없는 일인데도 말이다.
저자 은서란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번잡한 도시보다는 섬이 좋았다. 도시에서 일하며 살던 중,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토피가 심해지자 퇴직을 하고 섬에 가서 살기로 한다. 그는 자신이 안착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닌다. 제주도에도 가보았다가, 절에 들어가 비구니 무공스님과 선유보살님, 그리고 템플스테이 직원 다인까지 도합 여성 네 명이 함께 생활하기도 해본다. 그러다가 지리산 자락에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근처 마을로 이주하고, 그곳에서 우여곡절을 겪다가 근방의 다른 마을로 거취를 옮긴다. 그리고 그곳에서 훗날 자신의 양딸이 될 이웃 어리를 만난다.
서란과 어리는 썩 잘 맞았다. 이웃한 집에서 교류하다가 자연스레 살림을 합친다. 그들은 서로 달라 삐걱대는 부분을 조율하고, 친구로서 함께 시간과 마음을 나눈다. 그러다가 서란이 갑작스레 몸이 안 좋아져 응급실에 간 사건을 계기로, ‘가족’이 된다는 것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다. 법적으로 남남인 친구의 지위로서는 법적 보호자가 될 수도, 법정대리인으로서 상대방의 수술 동의서에 사인할 수도 없다. 숙고 끝에 그들은 가족이 되기로 한다. 가족관계증명서에 서로의 이름이 찍히는, ‘법적 가족’이.
이를 위해 그들은 모녀 관계가 되기로 한다. 우리나라는 민법상 성인이 성인을 입양하는 과정이 쉽다고 한다. 양부모가 될 사람이 양자가 될 사람보다 나이만 많으면 된다고. 그렇게 어리보다 50개월 많은 서란은 어리의 양엄마가, 어리는 서란의 양딸이 된다.
서란과 어리가 입양이라는 제도를 택한 건 우리나라에는 혈연관계가 아닌 성인끼리 결혼 외에 가족이 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혈연이나 혼인관계가 아니어도 가족의 지위를 인정해 주는 생활동반자법이 올해 4월 처음으로 발의됐지만, 통과되지 못한 상태다.
가족의 형태가 다양해지는 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다. 서란과 어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나의 미래를 그릴 흰 도화지 한구석에 새로운 그림을 그렸다. 내 미래는 아무도 모르지만, 어쩌면 그들처럼 친구와 함께할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변화하면서,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면서, 내 도화지는 더 다채로워질 것이라고 믿기로 했다. 일흔 살의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2023년 11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