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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서 Jan 27. 2022

사랑으로 말미암은 생(生)의 가능성

문학 리뷰 | 에밀 아자르,《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지음 | 용경식 옮김




생이란 게 별 볼 일 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고단해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그럼에도 우리를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정답은 없다.
그저 열 살쯤 되는 아랍인 소년 모모의 생을 따라가며 각자의 마음속에 자리 잡아 생을 지탱하는 기둥이 무엇인지 조심히 꺼내어 살펴보자.
그건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른다.



                 





별 볼 일 없는 생(生)이란 것


주인공이자 화자인 모모는 열 살짜리 아랍인 꼬마다. 아니, 사실 이런 단정적인 소개는 어울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출생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모모는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돌봐주는 로자 아줌마의 집에서 자랐다. 로자 아줌마는 유태인이다. 그들이 사는 파리의 벨빌 거리에는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많이 살고 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건 바로 그런 사람들이다. ‘진짜 프랑스인’이 아닌 사람들, 중심이란 단어와는 일억 광년쯤 떨어진 주변적 존재들이다. 


벨빌에서 살아가는 모모의 삶은 ‘진짜 프랑스인’이 아니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꼭 닮았다. 가짜 출생증명서를 보여주자 나이보다 너무 어려 보인다며 학교에서 퇴짜를 맞은 모모는 아이러니하게도 “귀찮은 일을 피할 수 있을 만큼 어려본 적이 한 번도 없”다. 로자 아줌마를 도와 자기보다 어린 아이들의 뒤를 닦아주느라 바쁘고, 생에 통달한 것처럼 굴기도 한다. 생활은 빈곤하기 그지없다. 로자 아줌마 집으로 아이들의 엄마들이 보내주는 양육비로는 근근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좋아하는 것들도 있다. 모모는 학교에 가지 못한 자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준 하밀 할아버지와 얘기 나누는 것을 좋아한다. 자비심 있는 의사인 카츠 선생님의 진료소에 가만히 앉아 있길 좋아하고, ‘여장 남자(난 평소에 이 단어를 사용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원작의 표현을 그대로 따르기로 한다)’인 롤라 아줌마와 파리에서 제일가는 멋쟁이 포주 은다 아메다 씨도 좋아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모모가 생을 바라보는 태도는 냉소적이다. 


“나는 마약 같은 너절한 것을 즐기는 녀석들을 좀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서 생의 엉덩이를 핥아대는 짓을 할 생각은 없다. 생을 미화할 생각, 생을 상대할 생각도 없다. 생과 나는 피차 상관이 없는 사이다.


모모에게 생이란 “피차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에게 생은 그리 거창하게 칭송할 만한 게 못 된다. 생의 달콤함은 모모의 것이 아니었다.     








간신히 엿본 희망그러나


내 생의 근원을 모른다는 건 몹시도 불안한 일임에 틀림없다. 제 출신과 나이에 대해서조차 확신을 갖지 못했던 모모는 마음 깊은 곳에 얼마나 커다란 혼란을 품고 살았을까? 모모는 자신을 낳아놓고 사라진 엄마의 존재에 대해 강한 의문을 품게 되지만, 로자 아줌마에게 아무리 물어도 그녀는 입을 굳게 다물고 만다. 


모모가 얼굴도 모르는 엄마가 자신을 보러 오게 하기 위해서 복통과 발작을 아무리 일으켜봐도 엄마는 끝내 나타나지 않는다. 엄마를 불러오는 데 실패한 모모는 다른 종류의 관심에 눈을 돌린다. 모모는 일부러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물건을 훔치고 주인이 자신을 발견하길 기다린다. 거세게 날아오는 따귀를 맞으면서 모모는 자신을 향한 타인의 관심을,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한다. 


모모가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방법은 다양하다. 어쩔 땐 도둑질을 하고, 또 어쩔 땐 질주하는 자동차들 사이에 덜컥 뛰어든다. 모모는 자신을 치지 않기 위해 우왕좌왕하는 운전자들을 지켜보는 게 즐겁다.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중요한 인물인 것처럼 느껴진다. 모모가 알고 있는 누군가의 관심을 끌기 위한 방법은 이런 것들뿐이다.


모모에게 있어 무조건적인 관심은 상상 너머의 것이다. 까닭 없는 다정함과 애정 어린 시선은 모모를 당황시킨다. 모모는 한 식료품점에서 여느 때와 같이 달걀 하나를 도둑질하고 주인이 따귀를 올려붙이길 기다렸지만, 돌아온 것은 쓰다듬는 손길뿐이었다. 그 식료품점 주인은 심지어 모모에게 뽀뽀를 해주더니 달걀 하나를 더 쥐어주는 것이 아닌가! 모모는 그 순간 “희망 비슷한 것을 맛보았다.”


그후 모모가 백화점에 심부름을 갔다가 만나게 된 금발머리 나딘 아줌마는 그의 희망을 또 한 번 일깨운다. 그녀는 모모에게 말을 건네고, 상냥함을 보여준다. 그러나 그녀에게 두 아이가 달려드는 걸 보고서 모모는 깨닫고야 만다. 그들은 자신과는 다른 세계에 속해있다는 걸. 그녀는 자신의 엄마가 될 수 없다는 걸. 희망은 그런 식으로 땅에 떨어져 버린다.     








로자 아줌마


모모가 자꾸만 ‘엄마’라는 존재에 대한 희망을 찾아 헤맨 것은 어떤 까닭에서였을까. 지금부터는 로자 아줌마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로자 아줌마는 소싯적 창녀로 일했던, 7층짜리 빌라 계단을 힘겹게 오르내리는 살찌고 늙은 유태인 여성이다. 나치의 유태인 수용소에 수감되었던 이력이 있는 그녀는 신경과민에 시달리고 가끔은 꽥꽥 소리를 지르곤 한다. 


창녀는 법적으로 양육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에, 로자 아줌마는 돈을 받고 창녀의 아이들을 대신 돌봐주는 일을 한다. 모모 역시 그렇게 맡겨진 아이 중 하나이다. 두 사람은 가족도 뭣도 아니다. 로자 아줌마는 모모의 엄마가 아닐뿐더러 따지고 보면 돈으로 엮여 있는 관계나 다름없는 것이다. 그러한 사실은 어린 시절의 모모에게는 꽤나 큰 충격이 되었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돈을 지불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나는 로자 아줌마가 그저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돌봐주는 줄로만 알았고, 또 우리가 서로에게 꼭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밤이 새도록 울고 또 울었다. 그것은 내 생애 최초의 커다란 슬픔이었다.


아마도 이때의 충격이 모모가 엄마를 찾아 헤매도록 만들었던 듯하다. 로자 아줌마의 돌봄과 관심이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니었고, 사실은 매달 집에 지불되는 돈에 대한 대가였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모는 마치 로자 아줌마를 사랑하지 않는 양 말하지만, 사실 모모에게 그녀는 생의 전부다. 완전히 다른 세계 사람인 나딘 아줌마와는 달리, 로자 아줌마와 모모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두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러니까, 서로에게 서로가 유일한 존재라는 것. 로자 아줌마가 점점 늙고 병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모모는 혼자 남겨질까 몹시도 두려워한다. 


나중에 로자 아줌마가 모모가 자신을 떠날까 봐 겁이 나 출생이며 나이에 대해 꼭꼭 숨겼다고, 다른 누구도 이렇게 사랑해본 적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 모모는 그녀를 와락 끌어안는다. 로자 아줌마는 전에 모모에게 “가족이란 알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녀에겐 모모가 “이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존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모모가 로자 아줌마가 양육비 때문에 자신을 돌본다고 생각해 너무나 슬퍼하자 그녀가 그렇게 달래준 것이다. 그때는 모모가 너무 깊이 상심한 나머지 그녀의 진심 어린 애정을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로자 아줌마는 언제나 모모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렇다. 그 어떤 우연적 만남도 생을 지탱하는 소중한 기둥이 될 수 있다. 혈연이라든가 가족이라든가 하는 개념은 딱히 사랑을 위한 필요조건도 충분조건도 아니다.     








우리 앞의 생


모모에게 생은 달콤하지 않았다. 오히려 생이란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를 늙고 병들게 하는 지독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이란 사랑이다. 생은 별 볼 일 없는 것이기도 했지만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기도 했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에 대한 사랑으로 생을 살아갔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모모는 하밀 할아버지와의 대화 끝에 이런 결론에 다다른다. 글쎄, 어떨까. 삶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단정 짓기란 참 어렵다.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쯤은 사랑 따윈 안중에도 없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만약 그런 삶이 있다고 한들 그게 가치 없는 삶이라고 폄하할 수도 없다. 또 사랑할 대상이 있다 해도 우리는 자주 사랑과 이별한다. 영원이란 건 없으니까.


그렇지만 분명 많은 경우 사랑은 사람의 생에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이미 이별해버린 사랑조차도 남은 생을 추동하는 동력으로 남곤 한다. 책의 원제는 ‘앞으로 남은 생’이다. 책은 다음 문장으로 끝맺는다.


사랑해야 한다.


사랑했던 것을, 사랑하는 것을, 그리고 사랑할 것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가만히 그 힘을 느껴보라. 때로 사랑은 생을 가능케 한다. 그런 가능성 속에서 우리는 우리 앞의 생을 살아간다.     





에밀 아자르(1914~1980)

에밀 아자르는 프랑스의 저명한 소설가 로맹 가리의 또 다른 필명이다. 로맹 가리는 1914년 모스크바에서 태어나 리투아니아와 폴란드를 거쳐 프랑스에 정착했다. 그의 유태인으로서의 삶의 경험은 작품활동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파리에서 법학을 공부한 후 변호사 연수를 받았으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공군으로 복무했고, 전역 후 27세의 나이에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하늘의 뿌리>로 공쿠르 상을 받는 등 소설가로서 이름을 날리지만, 로맹 가리라는 이름에 자신의 작품을 끼워 맞추려고 하는 문학계에 염증을 느껴 그의 나이 60세에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을 사용해 <그로칼랭>이라는 작품을 발표한다. 1975년 발표한 <자기 앞의 생>은 에밀 아자르의 두 번째 작품으로, 이 작품을 통해 유일하게 공쿠르 상을 두 번 수상한 작가가 되었다. 그 뒤로 로맹 가리와 에밀 아자르 두 이름으로 번갈아가며 집필활동 계속하다가 1980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에밀 아자르가 로맹 가리라는 사실은 그가 죽고 6개월 뒤에 출간된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이란 소책자를 통해서였다. 그는 이 책을 죽기 전 탈고해놓은 상태였고, 그의 비밀은 죽음 이후에야 밝혀졌다.        



인문교양 <월간 유레카> 44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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