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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의도비 Jan 24. 2024

꿈 값

내가 30대에도 꿈을 찾을 줄은 몰랐지


"내 꿈은 얼마?"


퇴근하면 수강생이 되는 직장인의 학원비일기

2018. 12 ~ 2022. 08




최승자 시인의 <삼십 세>라는 시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 살은 온다.'

딱 내가 20대 후반에서 30대를 진입할 때 느꼈던 감정이다. 이렇게 직장인으로 평생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백수로 죽을 수도 없을 시기였기 때문이다. 직장에 다니는 것은 좀처럼 마음을 붙이기 힘들어서 늘 안 맞는 옷에 억지로 몸을 구겨 넣고 있는 느낌이었다. 물론 나만 참으면 계속 다닐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맞지 않는다는 불편함과 회사가 언제든 내칠 수 있다는 불안함이 공존하는 직장인으로는 이도저도 안될 것 같았다. 꿈을 쫓아가는 일을 하면 불편함은 없이 불안함만 가지고 사니까 낫지 않을까. 그래서 벼랑 끝에 걸린 심정으로 꿈을 찾기로 했다.


꺼진 불도 다시 보자는 심정으로 어렸을 때부터 나를 돌이켜보았다. 하나라도 잘한다는 말을 들었던 게 있는지. 시키지도 않는데 자발적으로 했던 게 있는지. 조금이라도 더 재밌어한 게 있는지.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손에 잡힐 것 같은 게 떠올랐다. '글쓰기'였다. 어렸을 때 글쓰기로 몇 번 상을 탔던 것이 떠올랐고, 지금까지 늘 책을 읽고 있는 게 그 이유였다. 그런데 어떤 글을 잘 쓸 수 있을까? 세상에는 수많은 작가가 있는데. 그래서 퇴근하고 수강생이 되어 작가의 꿈을 찾아 헤매기로 한다.



01


작가인 듯 작가 아닌 그런데 작가 같은

방송 작가

기간: 2018. 12 ~ 2020. 09 약 1년 / 가격: 80만 원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출처: Unsplash


막상 배우려고 찾아보니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글쓰기 강의가 있었다. 부담스럽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KT&G 상상마당 홍대 아카데미에서 라디오 글쓰기 과정을 수강해 보게 된다. 라디오 작가에 대한 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일정이 맞아서 선택하게 됐다. 그 길로 라디오작가에 매력을 느껴서 여의도 금산빌딩에 위치한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에 문을 두드리게 되었다. 퇴근하고 후다닥 달려가 다시 학생이 되는 첫걸음이었다. 이때 비드라마과정을 수강하며 라디오, 예능, 다큐의 방송작가가 어떤 것인지 현업자들의 수업으로 배웠다. 내가 배운 바에 의하면 대본을 작성하는 사람은 분명히 작가지만 구성작가라는 것은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기보다는 방송을 만들어내기 위한 모든 일을 하는 멀티플레이어에 가까웠다. 작가인 듯 작가 아닌 그런데 작가 같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한 다큐 프로그램의 보조작가 기회가 왔지만 고민 끝에 고사했다. 내가 되고 싶은 것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사람이 아니라 글을 쓰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덕분에 사람들은 어떤 부분에서 공감하는지, 어떤 소재가 매력적인지에 대해 공부해 볼 수 있었다. 그래서 라디오 사연에 한 번 글을 써봤는데 그 달 월간 1등으로 선정되어 여행상품권을 받는 소중하고 즐거운 경험도 해보게 되었다. 그 경험은 나의 이야기를 쓰는 것은 어떨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져서 교육원 드라마 과정을 수강하게 되었다.





02


극단적으로 협업해야 하는 직업

드라마 작가

기간: 2020. 10 ~ 2022. 09 / 총비용: 약 320만 원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출처: Unsplash
출처: 한국방송작가협회 교육원 마이페이지


기초반에서 전문만에 이르기까지 수강한 결과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드라마 대본이라는 것은 쓰는 것 10%와 수정 90%로 만들어진다는 것이다. 수정의 또 다른 이름은 피드백의 반영이다. 한 사람만 피드백해 주면 그것만 반영하면 되는데, 여러 사람이 의견을 주면 이제 진짜 고난이 시작된다. 사람의 눈이라는 것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라서 누구의 눈에는 괜찮은 것이 다른 사람의 눈에는 거슬리기 때문이다. 적절히 반영해서 각고의 노력 끝에 수정을 한다고 해도 수정본에 대한 의견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그러면 그걸 또 반영해서 수정한다. 이 지난한 과정이 대본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 드라마작가는 극단적으로 협업을 잘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내가 꿈꿨던 드라마 작가의 모습은 혼자 고민해서 대본을 쓰는 사람이었는데, 사실은 정 반대였던 것이다.


이와 별개로 나만의 세계를 만들고 나만의 인물을 만들어 내는 것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즐거운 일을 너무 잘하고 싶어서 교육원 과제는 물론 다 하고 개인적으로 시나리오 작법 책을 사서 공부도 더 했다. 퇴근하면 후다닥 교육원으로 달려가고, 대본을 쓰기 위해 밤을 새워가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수정하고 갈아엎고 다시 쓰면서 일상을 살아냈던 시기는 체력적으로는 가장 힘들었지만, 정신적으로는 가장 살아있음을 느꼈던 약 2년의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세상에는 열심히 해도 안 되는 게 있는 법이었다. 나는 드라마 작가가 되기에는 태생적으로 너무 건조한 사람이었다. 진하게 인물에 몰입하지 못해 항상 스토리와 인물이 유기적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죽도록 노력하면 안 될 일이 없다고 하지만, 그건 맞지 않는 옷을 입기 위해 억지로 몸을 끼워 넣기 위한 노력이라는 걸 마음으로 느껴서 슬퍼지기도 했다.





03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다시 그냥 직장인

기간: 2022. 10 ~ 지금까지 

출처: Unsplash


돈과 오랜 시간 그리고 열정을 들였지만 드라마 작가라는 꿈은 접었다. 내 길이 아니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마음이 아프고 괴로웠지만 너무 열심히 했던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한 명의 시청자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렇지만 꿈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경험이 남았다. 그게 비틀거리던 나에게 생기를 주고, 다시 일상을 살게 했다.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돈을 번다고 생각하니 직장인이라는 일상도 의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여전히 불편하고 불안한 직장인이지만 마냥 괴롭지는 않다. 또 다른 꿈이 생기면 그걸 이루기 위한 돈을 모아두어야 하니까. 한 번 해봤으니 두 번째에는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약 4년이라는 시간, 약 400만 원이라는 돈을 들인 작가라는 꿈 값을 치르고서 얻은 것은 인생에 대한 자신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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