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리아스] 분노와 운명 앞의 인간

<고전에서 찾는 인간이해 #3>

by 여의도겨울바람

내가 일리아스 이야기를 처음 접한 것은 트로이라는 영화를 통해서였다.

그때는 아직 어렸고,
아킬레우스와 헥토르라는 멋있고 강한 두 전사의 대결 구도,
그리고 트로이 목마 같은 장면들이 이야기의 전부처럼 남아 있었다.

시간이 흐른 뒤 일리아스를 책으로 읽으면서 그 기억은 조금 달라졌다.


일리아스는 전쟁 이야기로 시작하지 않는다.
사랑으로도, 영웅의 용맹으로도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의 첫머리에 놓인 것은 한 인간의 분노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이 문장은 전쟁의 원인을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시작된 전쟁 한가운데서, 왜 이 이야기가 지금 이 감정을 꺼내야 하는지를 먼저 보여준다.
일리아스는 전쟁을 통해 인간을 말하기보다, 분노라는 감정을 따라 인간을 바라보는 이야기다.


아킬레우스의 첫 분노는
적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편에게서 왔다.
그리스 군의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그의 전리품을 빼앗으며 공개적으로 명예를 부정한다.

영웅의 세계에서 명예는 체면이 아니라 존재의 증거였다.
그 증거를 잃은 아킬레우스는 싸우지 않는다.
이 분노는 적을 쓰러뜨리려는 방향이 아니라, 스스로를 전장에서 떼어내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분노는 여기서 이미 파괴가 아니라 이탈의 형태를 띤다.

아킬레우스가 빠진 전장에서 전쟁의 양상은 달라진다.
그리스 군은 밀리기 시작하고, 트로이는 점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변화는 전략의 결과라기보다 한 인간의 감정이 만든 공백에 가깝다.
일리아스는 이 장면을 통해 개인의 분노가 결코 개인에게만 머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보여준다.


두 번째 분노는
모욕이 아니라 상실에서 시작된다.
아킬레우스를 대신해 전장에 나선 파트로클로스가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이때의 분노는 방향이 다르다.
적을 향하기보다, “내가 싸우지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자기 자신을 향한 감정에 가깝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전장에 나서면 죽을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돌아온다. 운명을 모른 채 돌진하는 것이 아니라, 알고도 멈추지 못하는 상태로.

아킬레우스가 다시 나타나자 전쟁의 흐름은 급격히 기운다.
그리스 군은 우세를 되찾고, 트로이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변화는 질서를 회복한 결과라기보다, 통제되지 않은 감정이 만들어낸 결과에 가깝다.
아킬레우스의 싸움에는 계산이나 절제보다 분노의 관성이 먼저 보인다.


헥토르의 죽음은 분노의 끝이 아니라 정점이다.
아킬레우스는 그를 쓰러뜨린 뒤에도 분노를 멈추지 못한다.
시신을 훼손하고, 전차에 매달아 끌고 다닌다.

이 장면은 승리를 말하지 않는다.
이미 목적을 잃은 분노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줄 뿐이다.
적은 죽었지만, 분노는 갈 곳을 찾지 못한 채 남아 있다.


분노가 처음 멈춘 순간은 전투가 아니라 만남에서 온다.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가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아킬레우스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는 왕의 몸으로 무릎을 꿇고, 자신의 아들을 죽인 자의 손에 입을 맞춘다.

왕이 아니라 아들을 잃은 아버지로 다가온 이 장면에서

아킬레우스는 처음으로 자기 분노를 인간의 얼굴로 마주한다.

타인의 상실을 통해 그는 비로소 자신의 상실을 한 발 떨어진 자리에서 바라보게 된다.

이 만남은 설득의 결과가 아니다.
같은 상실을 겪은 존재가 눈앞에 섰을 때, 분노는 더 이상 같은 방식으로 유지될 수 없어진다.


그러나 분노가 멈췄다고 해서 삶이 회복되지는 않는다.
파트로클로스는 돌아오지 않고, 헥토르는 죽었으며,
아킬레우스 역시 자신의 끝을 향해 이미 걸어 들어온 상태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더 이상 감정으로 움직일 수 없다.
남아 있는 것은 이미 선택해 버린 결과, 되돌릴 수 없는 시간, 피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이다.

일리아스가 말하는 운명은 신비한 예언이 아니라,
분노 이후에 남겨진 되돌릴 수 없는 상태 그 자체에 가깝다.
분노로 모든 것을 밀어붙인 뒤, 인간은 마침내 운명 앞에 서게 된다.

이 이야기는 분노가 멈춘 뒤에도 모든 것이 정리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분노 이후에 남겨진 결과를 의미나 명분으로 덮어버리지 않고 되돌릴 수 없는 상태 그대로 남겨 둔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영웅을 찬양하지도, 승리를 정리해주지도 않는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무엇을 말했는가 보다, 왜 이런 이야기를 남겼을지가 더 궁금해졌다.

이 이야기를 만든 호메로스는 인간의 분노를 설명하려 했던 철학자도 아니고,
혼자서 일리아스를 완전히 창작한 사람도 아니다.

여러 세대에 걸쳐 쌓여온 이야기들 가운데서,

인간의 분노가 시작되고 커지며 그 이후까지 끝내 지워지지 않는 버전을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 남긴 사람에 가깝다.

그는 분노를 정리하지 않았고, 운명을 해결하지도 않았다.
다만 그 이후까지를 이야기 속에 남겨 두었다.

고전은 답을 주기보다, 왜 이 이야기가 이런 모습으로 남겨졌는지를 계속 생각하게 만든다.

그 질문이 남아 있다면, 일리아스는 지금도 충분히 현재의 이야기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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