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시간

<직장인의 심리노트 #15 | 관리자 Part 5>

by 여의도겨울바람

관리자 역할로 몇 년쯤 시간이 지나면,

업무에 능숙해질 법도 한데 오히려 깊은 회의감이 찾아올 때가 있다.

성과가 나지 않아서도 아니고, 조직에서 인정을 받지 못해서도 아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내가 알던 유능한 나와 조금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과연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관리자로서의 역량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실무자 시절의 성공 방식과 관리자라는 새로운 역할이 내면에서 부딪히며 생기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실무자 시절의 우리는 명확했다.

내가 가진 기술로 문제를 해결하고, 내 손으로 결과물을 완성하며, 그 효능감으로 자존감을 채웠다.

하지만 관리자의 일은 모호한 면이 있다.

앞서 다룬 것처럼 내 전문성은 예전 같지 않은 것 같고,

후배들을 지적하고 결과물을 다듬는 일은 여전히 조심스러우며,

상사와 팀원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하느라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이 과정이 반복되다 보면 문득 이런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나는 사람들을 조율하고 관리하는 것보다, 차라리 내 일을 직접 할 때 훨씬 유능했던 사람이 아니었을까?’


이 질문은 관리자로서 겪는 과도기적 어려움을 자칫 적성의 문제로 오해하게 만든다.

“나는 관리자 체질이 아니야”라고 결론짓는 순간,

지금의 변화는 극복해야 할 과제가 아니라 피하고 싶은 스트레스가 되고 만다.

하지만 관리자라는 자리는 처음부터 누구에게나 몸에 딱 맞는 옷은 아니다.

오랜 시간 실무 전문가로 살아온 사람에게 관리자라는 역할은

익숙한 도구를 내려놓고 새로운 협업의 기술을 익히는 과정에 가깝다.

어색하고 서툰 느낌은 당연하며, 그 생경함이 곧 자격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시기의 관리자가 겪는 혼란은 역설적으로 역할의 확장을 받아들이는 신호이기도 하다.

과거의 내가 나의 결과물을 통해 가치를 증명했다면,

이제는 팀의 결과물이 원활하게 나오도록 환경을 만드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실무 기술이 손에서 멀어지는 것에 대한 불안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조직의 흐름을 읽고 적재적소에 자원을 배치하는 안목을 기르는 단계다.

이것은 단순히 직급이 올라가는 것을 넘어,

일과 나를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넓어지는 중요한 전환점이다.


정체성의 혼란을 갈무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완벽한 관리자라는 환상을 걷어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모든 갈등을 해결하고 모두에게 존경받는 관리자는 현실에 존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 이상향에 자신을 투영하다 보면 자책만 깊어질 뿐이다.

대신, 내가 가진 실무적 강점을 관리 업무에 어떻게 접목할지를 고민하는 편이 현실적이다.

분석적 감각을 가진 관리자, 현장 이해도가 높은 관리자 등

나만의 색깔을 가진 관리자의 모습을 찾아가는 것이 정체성 재정립의 핵심이 된다.


관리 업무에서 오는 소모감 또한 성과 없는 일이라기보다

조직 운영의 핵심 역량이 쌓이는 과정으로 바라볼 수 있다.

갈등을 조율하고 업무의 빈틈을 메우는 일들은

실은 조직을 유기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실질적인 감각을 단련시킨다.

지금 느끼는 불편함은 퇴보가 아니라,

실무자라는 익숙한 영역을 넘어 관리자라는 더 넓은 책임의 영역으로 진입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결국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은

스스로 이 역할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지금 당장 확신이 서지 않는다고 해서 스스로를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라 여길 필요는 없다.

관리자의 역량은 시간을 두고 서서히 체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낯설고 불편했던 이 역할에 조금씩 자신만의 방식을 입히다 보면,

어느덧 팀 안에서 중심을 잡고 있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나라는 사람을 증명하는 방식이 바뀌었을 뿐이다.

실무자로서 직접 뛰던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자연스럽다.

다만 이제는 그 경험을 바탕으로 팀의 성과를 뒷받침하는 조력자로서의 역할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것이 관리자로서의 여정을 거쳐, 실무와 전략을 잇는 단단한 조직의 허리로 자리 잡는 과정이다.


관리자라는 자리는 실무와 리더 사이에 머무는 정거장처럼 보이지만,

실은 조직을 가장 가까이에서 배우는 자리다.

때로는 서툰 후배를 지켜보며 기다림을 배우고,

선배라는 친밀함과 관리라는 평가 사이에서 관계의 선을 긋는 법을 익히고,

내 손에 남는 결과물이 없는 것 같은 보이지 않는 성과를 견디며,

위와 아래의 서로 다른 언어를 끊임없이 번역해 온 시간들.

그 과정 속에서 우리는 조금씩 깨닫는다.

조직은 개인의 능력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

사람과 구조, 감정과 기준이 복잡하게 얽혀 돌아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자리에 맞는 사람일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여기서 끝나는 질문이 아니다.

그 질문은 다음 단계로 고스란히 옮겨간다.

"그렇다면, 나는 어떤 책임까지 감당할 사람인가?"

관리자가 ‘사이에서 버티는 자리’였다면,

리더는 ‘방향을 정해야 하는 자리’다.

사이를 견디며 쌓아온 기준이 이제는 선택과 결정의 언어로 바뀌어야 하는 단계.

관리자의 시간은 어쩌면 그 거대한 책임을 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앞으로 질문은 달라진다.

"나는 조직의 방향을 책임질 준비가 되어 있는가. 그리고 그 책임을,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가?"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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