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없는 여행
꾸준히 유럽 여행기를 올리다가 어느 순간 일시정지되었다. 어떤 것에 대한 리뷰와 후기를 쓰는 일은 일상 에세이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작업보다 더 게을러지곤 한다. 어찌 되었던, 해당 작품이나 공간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먼저 설명해야하며, 관련 자료를 수집해서 바탕으로 나의 논리와 생각을 설득력 있게 써야 하기 때문에 다른 작업들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시간과 공을 들여야 한다. 반대로 에세이나 그림은 다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하고 싶은 주제나 그리고 싶은 이미지가 생각나면 이것을 얼른 제작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다. 내가 하고 싶은 주제가 정해져 있는 상태에서의 글 작업이나 그림 작업은 언제나 즐겁다. 중간 지점에서 멈춰 있는 나의 여행기는 언젠가 완성하기는 할 것이다. (어.... 보는 사람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흑흑)
여행
여행이란 언제 떠나야 할까, 이런 생각을 해본다. 회사에서 휴가를 내서 가거나, 아니면 퇴사를 하고 가거나 둘 중에 하나일 것이다.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이든 하고 있지 않는 사람이든, 여행이란 가까운 미래에 신경 쓸 것들이 없는 상태에서 떠나야 한다. 올해 초, 그때의 나는 모 제작사의 PD로 근무를 하고 있을 때였다. 하나의 프로젝트가 마무리되어가는 시점에 대표님의 허락을 받고 휴가를 신청했다. 그것도 혹시 몰라서 한 달 전에 미리 말을 해두었다. 연차 신청도 정상적으로 결재되었고, 무리 없이 해당 날짜로 달려가고 있었다. 휴가라고 해봤자, 이틀을 연속으로 연차를 신청했을 뿐이다. 주말을 포함해서 가까운 나라로 해외여행을 가려고 했었다. 편집을 하느라 추석에도 출근했고, 주말에도 출근한 나에게 이 정도의 보상은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여행을 떠나기 며칠을 남겨두고 한 상사가 나에게 갑작스러운 일거리를 주었다. 단 한 번도 해보지 않는 업무였고, 그 일을 시킨 상사 조차도 아무 정보가 없었다. 물어볼 사람도 없이 나 혼자서 처리를 해야 되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해보려고는 했지만, 감이 잡히지 않았고 상사에게 솔직하게 말을 했다. 나는 그가 말하는 해당 날짜까지 업무를 마칠 수가 없을 것 같고, 그 주에는 이틀 동안 연차를 신청해서 회사에 없다고 해두었다. 그런데 연차를 미뤄서라도 해야 한다는 식으로 갑자기 내게 벌컥 화를 내는 것이었다. 이렇게 바쁜 시기에 연차를 신청했다는 것에 대한 질타도 함께. 억울함이 밀려왔다. 내가 그동안 쉬지 않고 달려왔던 시간들, 그리고 휴가를 위해 일찍 양해를 구했던 부분들, 내 업무와 관련 없는 업무를 책임을 지고 해야 된다는 부담감. 그런 것들이 한꺼번에 총알처럼 가슴에 박혔다. 순간적으로 스트레스를 한꺼번에 받은 상태로 멍해졌다. 웬만하면 모든 부분에 대해서 감정적으로 대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때는 나도 화가 났다. 도대체 그러면 휴가는 언제 계획하고 신청을 해야 하는 것일까. 미리 말을 해도 욕을 먹고, 갑자기 말을 해도 그만한 사유를 대야만 하는, 그런 시스템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주장을 굽히지 않고 결국 어떻게든 일을 전날까지 마무리를 하고 휴가를 다녀오긴 했지만, 나는 여행지에서 자유를 즐길 수 없었다. 그는 또 곤란한 일을 나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여행을 가서도 머릿속으로 그것을 어떻게 어디 가서 누구에게 물어보고 처리를 하고 메일을 보내고, 마감 날짜는 언제이고, 이것을 수행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가 불러 일으키고.....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걱정하느라 마음 한 구석이 매우 찝찝한 상태로 비행기에 오른 것이다. 그런 것들과 함께 순간적으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그 ‘빡침’의 사건 또한 한 몫하고 있었다. 나는 아직도 그때의 여행을 떠올리면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휴가를 떠나기 전, 직장 상사와 불필요한 논쟁을 했으며 돌아와서도 마주해야 하는 여러 가지 부담스러운 과제들이 그 날의 공기를 탁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행은, 마음의 걱정이 없는 상태에서 떠나야 한다. 너무 큰 미래의,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그런 관념적인 고민들 말고 여행을 돌아오고 나서의 내 심경변화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확실한 부담 같은 것들을 말한다. 나는 너무나 명확하고 꺼림칙한 문제들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알았기에 여행을 편하게 즐길 수가 없었다. 이것은 안 가는 것만도 못했다.
길바닥에서 물 한잔을 마셔도, 행복한 여행이 좋다. 무언가를 빨리, 그리고 반드시 해야 된다는 강박이 없이 현재를 즐기고 싶다.
매일 같은 시간에 타야 되는 버스가 오지 않으면, 우리는 지각이라는 것을 할까 봐 초조하게 기다리지 않는가.
조금 늦어도 내일 가보면 되고, 내일 못 가면 다른 곳에 가도 또 그만의 즐거움을 발견하는 재미로 여행을 떠나기를 원한다.
글/그림 여미
yeoulhan@nate.com
여미의 인스타그램 @yeomi_wri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