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칵테일 바에서 알바하는 이야기

30년 된 이문동 바를 소개합니다 :)

by 주하

지난 2024년 7월부터 자취를 시작했다.

서울 동쪽 끝에 위치한 나의 대학교와 인천에 닿을락 말락 경기도 서쪽 끝자락에 있는

우리 집은 지하철 1호선과 7호선으로 약 2시간 거리다.


2시간? 할 만 하지 않나? 싶으면서도, 11시 수업을 가기 위해 아침 8시에 기상할 수 밖에 없는

말도 안되는 시간 낭비를 견딜 수 없었다. 심지어 지옥철 시간에 딱 걸렸으므로

이동하면서 독서를 하거나 과제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가끔가다 술자리가 늦게까지 이어지면 밤 11시에 1호선 막차 타고 출발해도,

7호선의 극악무도한 20분 배차간격으로 새벽 2시가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장마 때 비 때문에 1호선이 정체되는 날엔 1호선에만 1시간 30분 이상을 갇혀있어야 했다.


그렇게 나는 자취를 하겠다고 선언했고, 그와 동시에 본가 근처에서 하던 학원 알바를 그만두고

새로운 알바 자리를 찾던 중이었다.

그러다 동아리에서 친해진 언니 소개로 생각도 못했던 칵테일 바에서 일하게 되었다.

살면서 먹어본 칵테일 종류가 손에 꼽을 뿐더러, 술을 잘 하지도 못하는 내가 정말로

칵테일 바에서 일해도 될까..? 싶었지만 알바자리를 소개해 준 언니를 너무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보면 동경에 가까울 정도였던 것 같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수락했다.


내가 일하게 된 바는 동대문구에 위치한 「Tom's Beer」(이하 탐스)라는 바였다.

당시 사장님께서 바 앞건물 피자 가게를 인수해 「Tom's Taco」를 새로 론칭하려고 하셨기 때문에

새로운 알바들을 대거 뽑으셨던 것이다.


탐스는 약 30년 정도 된 바이다. 그래서인지 인테리어 내부가 상당히 분위기있다. 사장님께서 세계여행을 다니며 모은 기념품들이 이곳저곳 장식되어 있고, 촛불이 흘린 촛농들은 나무의 뿌리처럼 탁상 위에 아름답게 눌러붙어 있었다.


첫 근무 날 알바 자리를 소개해 준 언니랑 같이 일을 했다. '지거'라는 말을 처음 들어보았다. 그리고 양주들 이름 읽는 법, 사워믹스 제조법, 그라나딘 제조법, 안주 만들기, 레몬 슬라이스하기 등등 여러가지를 배웠던 것 같다.

칵테일 레시피나 안주 만드는 법은 레시피에 다 적혀 있어 어려울 게 없었다. 다만 조금 어려웠던 점이 있다면 밤 늦게까지 일을 해야했던 것, 술에 취한 손님 (많진 않았지만 종종 있었다) 잘 돌려보내 드리기... 지거를 다루는 법이 손에 익지 않아 음료 준비 시간이 오래걸렸던 점, 그리고 요식업 자체가 처음이라 가게 점원으로서 손님에게 말을 것 자체가 어려웠던 기억이 있다.



事件 or エピソード

- 사건 혹은 에피소드

그 중 몇가지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를 뽑자면, 여진언니와 둘이 알바를 하던 날이었는데, 몹시 취한 남자 손님께서 가게 마감을 해야한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새벽 1시가 넘도록 집에 안 돌아가셨던 일이 있었다. 늦은 시각이었고 더더욱이 평일이었기 때문에 가게에는 사람이 없었고, 남자 손님, 여진언니, 나 이렇게 셋이 남았다. 난 사실 12시 퇴근이었고 여진언니 혼자 마감조였는데, 도저히 취한 남자와 언니를 가게에 단둘이 두고 갈 수 없어서 같이 마감을 했다. 탐스는 바텐더와 손님이 말을 섞지 않는 그런 건전한 바인데, 가끔 요상한 바로 착각하고 혼자 오는 중년 남성분들이 계신다고 했다. (사장님 피셜) 요즘엔 거의 없다고 하셔서 안심했었는데, 그 날 여진언니와 둘이 있을 때 하필 잘못 걸린 것이다. 그 분은 우리에게 술을 권유하셨고, 사실상 말이 권유지 거진 강요였다. 정말 못된 마음으로 그랬던 건지, 그저 취해서 그랬던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거주지를 물어보고, 나이, 학교, 학과 등등 신상정보를 묻기까지 했다. 나는 순진해서였는지 생각이 짧아서였는지, 사실대로 술술 불어버렸고, 여진언니가 다음엔 이런 일이 있으면 거짓말을 해야 한다고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그 분이 언니와 나의 MBTI를 물어보셨는데 그제서야 난 거짓말을 했다. ㅋㅋㅋ 지금 생각하면 참 웃긴 일이다. 결국 그 분은 새벽 2시쯤 매고 왔던 베낭을 입에 물고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하셨다. 술 취한 개를 처음 보았던 경험. 그 분이 점점 개가 되어갈수록 여진언니랑 웃음 참느라 곤역이었다.



2024 외대역 선정 최고의 사장님

그런 흉악한(?) 일을 당하고도 계속 알바에 남아있었던 이유는 사장님이었다. 사장님은 우리 아버지보다 연세가 많으셨다. 그래서인지 할아버지처럼 친근하게 대해주셨다. 그리고 알바생들의 살을 찌우셨다. 요리 솜씨가 기막히셔서 알바하는 날엔 사장님께서 주시는 야식을 주구장창 먹기도 했다. 타코 가게 초창기였기 때문에 신메뉴를 개발한다고 이것저것 맛보라고 하셨는데, 정말 보탬 없이 전부 맛있었다. 아무래도 직접 멕시코에서 먹어본 타코 맛을 재현하셨으니, 한국에서 쉽게 맛볼 수 없는 맛이었다. 근처 대학을 다니는 외국인 유학생이 와서 먹어보고는 고향의 맛이라며 감탄했다며 우리에게 자랑하시는 귀여운 사장님이시다. 항상 유쾌하시고, 껄껄, 웃으시지만, 속이 깊으신 분이다. 견식도 넓으시다. 가끔 가게에 손님이 없으면 알바생들에게 젊었을 적 여행담을 풀어주신다. 단순히 뭘 했고 뭐가 좋았고 설명해주시기 보다, 그 나라에서 뭘 느꼈는지, 어떤 경험을 했는지, 그 경험에서 느낀 교훈은 뭔지 말씀해주신다. 항상 그런 진지한 말씀을 하실 때면 눈가가 초롱초롱 해지시는 것을 보고, 사장님처럼 나이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장님처럼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삶



아날로그 감성의 끝판왕, 무전기

탐스는 그러한 사장님의 특징답게 30년 전 역사 속 아날로그를 추구한다. 사실 추구한다기 보다 사장님이 아날로그 밖에 쓸 줄 모르신다. 바의 지하 계단을 올라오면 바로 앞에 탐스 타코 매장이 있어서 가끔 바에서 타코 메뉴를 시키시는 분들의 메뉴를 우리가 전달하고, 서빙하러 올라갔다 내려갔다 해야 했는데, 매번 올라가기 다리도 아프고 비효율적이기도 해서 사장님께서 테무에서 무전을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다주셨다. 음질이 썩 좋진 않았지만 꽤나 유용하게 썼다.


타코 메뉴 받으면 무전 치라고 했을 때 농담인 줄 알았는데, 진짜였던 것... 장난감 무전 말고 진짜 무전을 써 본 건 20년 인생 중 처음이었다. 색깔도 노랑노랑 귀여웠던 무전.

P.S.지금은 아쉽게도 카톡으로 전달한다.




あなたの好みは?

당신의 취향은?


종종 신청곡을 받고 틀어주는 칵테일 바가 많다. 하지만 우리 바는 어느 순간부터 신청곡을 받지 않고 있다고 했다. 추측하기로는, 무언가 사건이 있었던 모양이다. 뭐 아무튼 그랬더랬다.

8월의 어느날 꽤나 내공이 쌓여 혼자 마감을 맡았었는데, 어떤 손님 한 분과 나 단 둘이 바에 남겨졌다. 손님은 한 분 남으셨지만 정리할 테이블이 많았던 나는 이리저리 날아다녔다. 내가 날아다니는 사이 혼자 남은 손님께서 노트북 앞에 사진처럼 티슈에 노래 제목과 가수를 적어 신청곡을 써 주셨다.


신청곡 받아주지 말라는 언니들의 말을 뒤로 하고

'한 분만 남으셨는데 뭐~' 하는 마음으로 신청곡을 틀어드렸다. 그러자 점점 노트북 앞으로 티슈가 쌓여갔다. 그렇게 틀어드리다가, 새벽 2시가 되어 마감을 해야했다.

항상 느끼지만, 혼자 칵테일 바에 와서 깊은 생각에 잠긴 분들께 마감을 고지하는 일이란 마음 아픈 일이다. 하지만 사장님께서 마감하라고 하시면 거역할 수 없는 일... ^^ 그러자 손님께서는 뜻밖의 말이 적힌 티슈를 건네시는데.........

그것은 바로.............

⬇️⬇️⬇️

Anything which bartender favorite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던 느낌이 생생하다. 처음엔 아무 생각없이 유튜브 창에다가 검색하다가, 문득 알아차리고 아주 자신있게 Radiohead - Creep을 틀었다. 전주를 듣자마자 손님은 나를 보며 빵 터졌고, 우린 취향이 같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손님은 노래가 끝나자 나갈 채비를 하시며 자신이 속한 밴드 이름과 이번주 토요일에 무대가 있다며 공연장 위치를 알려주셨다. 알고 보니 밴드 공연을 하시는 분이었던 것이다.

얼굴 기억할테니까 꼭 오라고 신신당부 하셨고, 나는 시간이 되면 갈게요, 라고 말은 했지만 가지 않았다.

이젠 일이 없을 때 책을 읽을 정도로 짬이 찬 나

그 분께서는 탐스에서 알바하는 분 중에 지인이 있었던 모양이었는지 그 분을 통해 내 연락처를 물어보셨다. 하지만 나는 알려주고 싶지 않다고 완곡한 거절의 의사를 밝혔다.

그저 딱 그런 추억으로 남겨두고만 싶었다.

사실 묘한 겁이 나기도 했었던...


아직도 바 오픈준비를 할 때 노트북과 스피커를

틀면 그 분 생각이 난다.


만약 그 주 토요일 내가 공연을 보러 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좋은 친구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일텐데 말이다.


부족하지 않은 아쉬움이 남는다.





나의 어린 여름이 몽땅 담긴 소중한 바, 그리고 부드러운 데킬라

우리 바 자랑하는 사진으로 마무리하며 글을 마친다.


미숙한 알바생, 사고도 많이 쳤지만 따스하게 품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에서 처음 마신 데킬라의 쌉쌀하지만 부드러운 맛의 기억으로 세상을 살아갑니다.�

탐스에서는 무료 포켓볼을 칠 수 있습니다 하하~
포스기도 존재하지 않는 아날로그 끝판왕! 탐스 타코에선 포스기 쓰는데 괜히 뭔가 그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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