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은 보편적인 언어로
"영감이 떠오르면 모든 일을 미뤄두고 바로 적어 내려갑니다."
언제 시를 쓰는가 묻는 질문에 한 시인이 답했다. 약속이 있어 막 나가려던 순간에도, 출근하는 순간에도 어김없어서 가끔 주변 사람들의 원성을 사기도 한단다. 어떤 시인은 수첩을 몸에 항상 지니고 있다고 했다. 시상이 홀연히 사라지기 전에 하나라도 더 붙잡고 싶어서 말이다. 시인들처럼 기발한 착상이 떠오른 적은 없지만, 시를 쓸 때 혹여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몇몇 단어를 적어두는 버릇이 생겼다. 이번 주에는 어떤 시를 써볼까 고민하다 메모장에 쓰인 단어들을 훑어보았다. 그중 한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춤추는 염소.
매일 아침 글 모임 레브 카톡 방에는 새로운 칼럼이 한 편씩 올라온다. 유료 칼럼 서비스를 구독 중인 레브 멤버가 감사하게도 24시간 동안 유효한 글 링크를 공유해 주는 덕분이다. '춤추는 염소'를 만난 것도 이 칼럼을 통해서였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에 살던 염소 떼가 우연히 어떤 열매와 잎사귀를 뜯어먹었는데, 그 후 피곤한 줄도 모르고 밤새도록 신나게 춤을 췄다고 한다. 염소가 살던 동네 이름은 카파이고, 미지의 열매로 만든 음료가 지금의 커피가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처음 커피를 마셨을 때 염소처럼 신세계를 경험했다. 고등학교 시험 기간 때였다. 너무 졸려서 친구들과 편의점 캔커피를 하나씩 사서 마셨는데, 새벽까지 눈이 말똥말똥하고 정신은 또렷했다. 마음만 먹으면 밤을 새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후 시험 기간이 되면 캔커피를 한 잔씩 마시곤 했다. 지금은 하루에 두세 잔씩 마셔도 잘 시간이 되면 눈이 감긴다. 피곤을 잊으려고 마시는 커피가 도리어 뇌를 지치게 만든다는 기사를 읽을 때면 멈칫하다가도, 잠이 깨지 않아 몽롱해지면 자연스레 진한 커피에 손이 간다.
요즘에는 저렴한 테이크아웃 커피 프랜차이즈가 많다. 우리 동네만 해도 커피 한 잔에 2천 원 하는 가게가 생기더니, 그 옆에는 1,600원, 바로 앞에는 1,500 원하는 가게가 들어섰다. 아침 출근 시간에 그 앞을 지나칠 때면 가게 안이 분주해 보인다. 작은 번호표를 들고 차례가 되길 기다렸다가 커피 한 잔씩 손에 들고 출근하는 직장인들의 모습이 낯설지 않다. 그 틈에 끼어 나 역시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얼마 전, 예전 직장에 다녀왔다. 직장을 그만둔 후로 사무실에 다녀온 건 참 오랜만이다. 함께 일했던 동료들과 점심 약속이 있었는데, 잠시 사무실에 들러 다른 분들과도 인사 나누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아서였다. 어색할 줄 알았는데 냉동인간처럼 그대로인 분들을 보니 나도 그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근황을 나누다가 초등학생이었던 선배의 자녀가 이제 고등학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워킹맘이던 선배는 늘 시간에 쫓기듯 일했다. 퇴근 시간이 늦어질수록 아이들이 기관에서 엄마를 기다리는 시간도 길어졌기 때문이다. 나 역시 몇 년 간 워킹맘으로 지내며 미혼일 때는 몰랐던, 선배의 애환을 조금씩 알아갔다.
머릿속을 떠다니는 여러 기억 가운데 '춤추는 염소'와 '워킹맘'을 생각하며 시를 썼다.
그리고 시 수업 시간에 이 시를 발표했다.
제목은 마리오네트.
마리오네트
한 잔에 천오백 원
커피 사 들고
일터로 향하는 마리오네트
커피 열매 먹고 밤새도록 춤추던
아프리카 염소처럼
데꾼한 눈 감추려
늘어진 몸 세우려
쓰디쓴 커피 한 잔 들이켠다
노래하는 이 없는 하루의 끝
비거덕비거덕 고단한 어깨 들썩이며
골목길 지나갈 때
저 멀리 보이는 익숙한 불빛
마디마디 묶인 실 풀어내고
집으로 향하는 가벼운 발걸음
교수님은 마리오네트가 누구냐고, 당신이냐고 물었다. 아니요, 직장을 다니는 엄마, 워킹맘들을 생각하며 썼다고 답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교수님은 제목을 바꿔야겠다고, 누구나 아는 보편적인 언어를 쓰라고 조언해 주셨다. 정해진 일정에 맞춰 일상을 살아가는 엄마들의 모습을 마리오네트 인형으로 표현했는데 제목을 어떻게 바꾸면 좋을까 고민이 되었다. 시를 쓰기도 어렵지만 제목을 짓는 건 더 어렵다. 마리오네트보다 더 좋은 제목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제 주인을 찾을 때까지 빈자리로 남겨둔다.